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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진 지리산 이야기/제밌지.지리야그.!

이현상 평전

이현상평전

  • 글쓴이: 무심재
  • 조회수 : 33
  • 09.01.06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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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화제의 책] <이현상 평전>

프레시안 2007-08-15 강양구 / 기자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저 라틴아메리카 혁명가 체 게바라는 알아도 조선의 혁명가 이현상은 모른다. 마오쩌둥ㆍ호치민ㆍ티토ㆍ카스트로, 그리고 김일성은 알아도 이현상은 모른다. (…) 아름답고 훌륭한 새 세상을 만들고자 30년 동안 밤을 낮 삼아 뛰어다녔던 불요불굴한 우리 조선의 혁명가 이현상.” (소설가 김성동)

이현상. 낯설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5년간 빨치산을 이끌었던 그는 지난 50년간 남쪽에서 존재를 부정당했다. 1980년대 후반 집중적으로 나온 빨치산을 소재로 한 반공 소설, 실화의 등장인물로 잠시 ‘상품’이 되기도 했지만 금세 잊혔다. 2000년 6월,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김대중을 안내했던 이가 그의 막내딸이라는 사실이 화제가 되는 정도였다.

이렇게 완벽히 잊힌 이현상의 삶을 복원한 <이현상 평전>(실천문학사 펴냄)이 광복절을 앞두고 출간됐다. 21세기에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골수’ 사회주의자의 삶을 되돌아보는 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을까? 왜 이현상을 ‘망각의 늪’에서 끄집어내느라 애를 써야 하는 것일까?

이현상과의 갑작스런 만남

<이현상 평전>의 저자 안재성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수년간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정국을 연구하면서 ‘이현상’이라는 이름을 수도 없이 만났지만 따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이미 남한에 널리 이름이 알려졌고 북한에서도 영웅으로 등록돼 있는 이현상을 새삼스레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안재성이 이현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엉뚱한 이유 때문이었다. 1948년 10월 여수ㆍ순천에서 일어난 반란 사건을 추적하던 그는 순천에서 반란군이 살해한 이들의 숫자가 1700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맞닥뜨린다. 물론 반란군을 진압한다는 명목 하에 군인, 경찰이 학살한 3000명~7000명의 민간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숫자다. 그러나 그는 충격을 받았다.

“아득한 절벽을 만난 기분이었다. 아무리 그들이 반민족적인 패악을 저질렀다 해도, 혹은 개인적인 원한을 맺었다 하더라도, 아무 저항도 할 수 없는 포로들을 그토록 잔인하게 무더기로 학살할 수 있다면 이것은 정의가 아니었다. (…)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혁명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혁명은 증오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이런 안재성의 앞에 이현상과 5년 동안 지리산에서 함께한 생존 빨치산 대원이 나타났다.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이현상 선생님은 여순 사건을 봉기라거나 항쟁이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 수많은 인민과 혁명 역량을 훼손시킨, 크나큰 오류요 죄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이현상의 삶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현상, 타고난 혁명가

이현상의 삶은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삶과 많이 겹친다. 게바라가 의사로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해방을 위해 온몸을 던진 것처럼 이현상 역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풍족한 삶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독립운동의 길로 나섰다. 1926년 ‘6ㆍ10만세운동’ 때 맨 처음 만세를 부른 이가 바로 22세의 이현상이었다.

“역사는 자신의 존재에 의거하지 않은 지식인 출신 혁명가의 나약함과 우유부단함에 관한 많은 사례를 보여준다. (…) 그러나 역사는 그 반대의 경우도 무수히 보여준다. 자기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없더라도 타인에 대한 애정과 정의감만으로 기득권을 버리고 변혁운동에 띄어들어 아낌없이 죽어간 사례들이다. 자신이 처한 부당한 현실에 분개하고 분노를 폭발시키는 일은 생존의 본능이지만, 타인의 고통에 분노하고 목숨까지 걸어 싸우는 일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인이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지식인이거나 노동자이거나 아무 상관없이, 타인에 대해 얼마나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성품의 문제였다.”

이현상은 타고난 혁명가였다. 그가 평생 변절하지 않고 사회주의자로 살 것을 간파한 이는 바로 일본 경찰이었다. 학생 조직을 꾸리다 두 번째로 구속된 그를 심문한 일본 경찰은 이렇게 적었다. “일견 온순함을 가장하고 있으나 음험한 자로서 과묵하며 의지가 대단히 강고함. 극렬한 사회주의자로서 의지가 매우 강고하므로 ‘개전할’ 가능성은 없음.”

인간에 대한 예의

이현상은 193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한다. 감옥에서 만나 의기투합한 이재유, 김삼룡 등과 함께 1933년 1월 결성한 ‘경성 트로이카’와 4년 7개월의 옥살이를 끝내고 나오자마자 1939년 1월 다시 결성한 ‘경성코뮤니스트그룹’은 싹이 말라버린 1930년대 국내 항일운동의 빛나는 이름이었다.

체포된 지 2년 만에 탈출한 이현상은 제3의 사회주의 항일운동 조직을 준비하던 중 해방을 맞는다. 해방된 지 사흘이 지난 1945년 8월 18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는 이현상, 박헌영, 이관술, 김삼룡, 이강국 등이 벅찬 감정을 안고 모인다. 그때만 해도 불과 10년도 안 돼 같은 민족, 같은 동지의 손에 대부분 목숨을 잃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1948년 10월, 이현상은 남조선노동당 간부부장의 자격으로 우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켜놓고 우왕좌왕하고 있던 여수, 순천의 반란군을 수습해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일제 강점기 때 그가 했던 12년간 감옥살이이보다 훨씬 더 험한 5년간의 산중 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의 나이 42세 때였다.

빨치산 생활을 하던 5년 동안 이현상과 그의 동지들이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던 기간은 단 18일. 한국전쟁 중 북진하던 미군이 비껴간 강원도 세포군 후평리에서 보낸 기간이었다. 나머지 기간에 이현상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덕유산, 백아산, 백운산, 소백산은 물론이고 전쟁 초기에는 낙동강을 건너 국군, 미군을 교란하는 역할까지 떠맡았다.

이 기간에도 그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았다. “이현상 선생님은 교전 중이 아닌 이상, 포로로 잡은 군인이나 경찰을 절대 죽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토벌대에 협조하다가 잡힌 민간인은 물론, 경찰 첩자로 산에 들어왔다가 잡힌 사람들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인정이 참 많은 분이었지요. 그것 때문에 나중에 온정주의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전쟁은 끝났는가?

1953년 9월 18일, 지리산 반야봉 남쪽 빗점계곡에서 이현상은 목숨이 끊어진 채 발견됐다. 경찰이 그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목에 여덟 발의 총알이 박혀 있었다. 그를 호위하다 열흘 전에 경찰에 잡힌 김진영, 김은석은 시신을 보자마자 털썩 주저앉았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죽여주십시오.” 이들을 본 경찰은 지리산이 떠나가라며 만세를 불렀다.

이렇게 이현상은 비극적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껍데기만 남은 그의 시신은 부패하지 않도록 방부제를 넣은 후 서울 시내에서 ‘전시’되었다. 그의 시신이 지리산 인근 섬진강 백사장에서 화장된 것은 1953년 10월 8일, 죽은 지 20일이 지난 후였다. 그의 장례는 항일운동에 평생을 바친 그의 삶을 존중한 토벌대장 차일혁이 치렀다.

“이현상에게 더 잘 어울리는 호칭은 선생님이었다. (…) 적군이라도 교전 중이 아닌 이상 절대 죽이지 못하게 하고, 동지의 주검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던, 눈보라 치는 겨울 산중의 걸인 움막 같은 천막 속에서 추위에 떨며 홀로 책을 읽다가 스르르 지쳐 잠들곤 하던 영원한 선생님이었다.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아니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혜택을 버리고 혁명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춥고 배고픈 산속에서 죽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 인간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사랑, 약자에 대한 동정심과 인명존중의 정신이라는 거대한 수림이 없었다면 자기희생의 마음을 지켜갈 수 없었다.”

비록 이현상은 지리산에서 운명했지만 그의 영혼은 반세기 동안 계속 현신해 왔다. 나이 어린 시다들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며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다가 결국 죽음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저항했던 허세욱 등으로…. 이현상과 동료들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역사의 빈칸을 채워넣은 안재성

<파업>의 작가 안재성(47). 안재성은 1986년 '노동3권 보장'을 외치며 분신한 한 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은 <파업>을 통해 한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 받는 소설가다. 정화진, 방현석 등과 함께 노동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던 그는 1990년대 초반 돌연 펜을 놓았다.

안재성은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돼 첫 수배를 당하는 것을 시작으로 구로, 사북, 태백 등에서 노동운동을 하면서 누구보다도 1980년대를 치열하게 살았다. 그런 그가 갑자기 '달라진 세상에서 글을 쓰는 것이 쉽지 않았으리라. 그는 1990년대를 포클레인을 운전하며, 또 농사를 지으며 보냈다.

그랬던 그가 2000년대 들어 한국의 근ㆍ현대사에 초점을 맞춘 글로 다시 돌아왔다. 특히 2004년부터 펴낸 <경성 트로이카>(사회평론 펴냄), <이관술 1902~1950>(사회평론 펴냄)은 이재유, 이관술, 김삼룡 등 그 이름조차 낯선 무명의 혁명가를 역사 속에서 불러내 큰 반향을 얻었다. 이번에 펴낸 <이현상 평전>도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소설가 김성동은 <이현상 평전>의 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역사가라는 사람들은 우리 조선의 혁명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 그 잘난 역사가들이 괄호 쳐버린 역사의 빈칸을 채워넣은 것이 작가 안재성이다. 이른바 역사가라는 이들은 이 엄청난 일을 해낸 작가 안재성에게 모자를 벗어야 한다.”

 


이현상 연보

1905년 9월 27일 (1세)
충청남도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 116번지에서 사백석지기 양반집 육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이면배와 두 형 이형기, 이현석이 차례로 군북면 면장을 지냈다.

1910년 6세
8월 22일 한일병탄으로 조선은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다.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기 시작

1920년 16세
2월 전북 무주군 무풍면 출신의 최문기와 결혼

1921년 17세
금산 읍내 금산 보통학교 사학년에 편입

1923년 19세
전북 고창군의 사립 고창고등보통학교에 진학 / 큰딸 무영 출생

1926년 22세
순종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6월 10일 6·10 만세 운동 참여 / 구속 6개월 만인 11월 17일 기소유예로 석방되나 중앙고보에서 퇴학당한다.

1927년 23세
4월에 중국 상하이로 밀항. 한인 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해외운동의 분파성과 안일함에 회의를 느껴 3개월 만인 7월에 귀국. 금산 집에 머물며 금산청년동맹, 금산학우회, 금산학생친목회 등에서 활동한다.
외아들 극출생

1928년 24세
서울의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 조선공산당의 청년단체인 고려공산청년연맹에 가입. 학생 야체이카를 조직하고 책임을 맡음. 학생과학연구회 서무부장을 맡는 동시에 개인적으로는 보성전문과 연희전문, 제일고보 학생들을 조직하여 투쟁을 지도하는 임무를 맡음. 양정고보와 경신고보 동맹휴학을 지도.
활동 4개월만인 9월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 3개월간의 가혹한 고문 끝에 징역 4년형을 언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됨. 감옥에서 이재유, 김삼룡 등을 만나 장차 노동운동을 함께 하기로 약속.

1932년 28세
11월에 만기 출소 후 이듬해 1월 김삼룡, 이재유 등과 '조산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 트로이카' 결성. 동대문과 용산을 중심으로 한 서울지역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담당.

1933년 29세
경성트로이카 최고지도부의 일원으로서 동덕여고보, 조선중앙기독교 청년학교, 숙명여고보, 경성제대 등 십여 개 학교의 동맹휴학을 지도하는 한편, 8월부터 9월까지 별표고무, 종연방직 등 여덟개 공장의 연쇄파업을 지도. 12월에 체포되어 징역 4년을 언도 받고 서대문형무소와 함흥형무소를 전전.

1934년 30세
둘째 딸 문영 출생.

1938년 34세
6월에 만기 출소하여 이관술, 김삼룡, 이순금, 정태식 등과 함께 조직재건에 나서 십여 개 공장에 노동자 조직을 신설하는 한편, 12월에 화요회 계열의 지도자 박헌영을 영입해 '조선공산당 재건 경성콤그룹'을 결성. 인민전선부와 선전부를 맡아 국내의 항일무장투쟁을 준비.

1940년 36세
10월에 체포되어 재판을 기다리던 중 고문후유증으로 인한 폐병으로 건강악화.
셋째딸 상진 출생.

1942년 38세
10월 들어 이십일 간의 단식투쟁으로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병보석으로 석방됨. 3개월 후의 재수감을 거부하고 도주, 덕유산 단지봉 아래 암자에서 건강을 회복한 후 이주상과 함께 경상도 지역에 내려가 활동하다가 경찰에 발각되자 대전으로 올라와 이관술, 김봉한 등과 활동. 가까운 금산과 대전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음.

1945년 41세
9월 19일 명륜동 김해균 집에서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 재건모임에 참여.
9월 19일, 정식으로 '통일재건 조선공산당'이 출범되자 박헌영, 김삼룡, 김형선과 함께 조직국 정치위원으로 선출됨.
11월,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회장에서 조선공산당을 대표해 축사.
12월, 국군준비대 전국대회에서 인민의 군대가 되라는 내용의 연설.

1946년 42세
11월 23일 남조선노동당 결성. 중앙위원으로서 노동부장에 선출됨.
얼마 후 남로당 간부부장과 기관지 노력인민의 인사부장을 겸임함.

1947년 43세
2월 7일, 영등포 조선피혁에서 좌우익 노동자들 사이에 폭력사태가 벌어지자 남로당 노동부자응로서 관여하다가 체포됨. 일제 아래 악명높은 고문전문가이던 노덕술 등으로부터 가혹한 고문을 받다가 두달만에 불기소로 석방됨, '고문강자'라는 별명이 붙음.
6월 25일, 기관지 노력인민에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이던 약산 김원봉에 대한 기고문을 게재하는 등 무력투쟁으로의 방향전환 시사.
7월, 남로당 내에 군사부를 신설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함.

1948년 44세
3월 하순, 철원의 노동당 루트를 따라 38선을 넘어 월북.
4월 14일, 평양에서 열기로 한 남북연석회의에 남로당 대표로 참석.
5월부터 3개월간 해주의 강동정치학원에서 군사훈련을 받음.
8월초 평양에 올라와 김일성과 면담한 후 이주하와 함께 남한으로 돌아옴.
10월 22일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남 여수의 국방경비대 제 14연대를 지도하기 위해 순천역에 도착, 반란 주동자들로부터 지휘권을 인수받아 본격적인 무장유격전 시작.
11월 중순, 육뱅여 명의 반군을 규합, 정식으로 지리산유격대를 결성하고 로명선이란 이름으로 사령관에 취임, 지리산 일대에서 군경과 충돌을 계속.

1949년 45세
1월 중순, 반란 주모자 지창수 체포, 부유한 가족들의 구명운동으로 사형을 면했으나 이듬해 한국전쟁 발발 직후 처형당함.
2월 28일 남로당 문화부장 김태준이 인솔하는 시인 유진오 등 일곱명의 문화공작대 조우. 문화공연을 하고 이틀만에 귀경하던 공작대 전원 남원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함.
4월 8일 한달 간의 삼일절 기념투쟁 중 거창에서 국군 대병력을 만나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지리산으로 돌아오던중 본부대 일행, 백사골 반선리에서 반공주민들의 유인작전에 넘어가 술 마시고 자다가 몰살됨. 김지희. 홍순석 등 본부대 지휘자 열일곱 명이 사망하고 이현상은 잔여 인원 150여명을 이끌고 피아골 구례군당에 합류.
5워르 남로당 지도부로부터 지리산에 인접한 여수,순천,광양,구례,곡성의 다섯 개 지구당을 통합해 이현상이 위원장을 맡아 지도하라는 지령 도착, 이에 따라 구례군당 유격대 등을 통합해 300여 명 규모의 유격대로 전열을 재정비하고 박종하를 참모장으로 함.
6월 25일, 평양에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 결성되고 30일에는 조선노동당 창당. 김일성과 박헌영, 소련으로 부터 전쟁 물자를 공급받는 한편 800여 명의 유격대를 남파. 이현상의 지리산 부대는 제2병단으로 명명됨.
9월 들어 9·9투쟁에 총력, 수백건에 이르는 크고 작은 전투와 시설물 파괴 감행. 9월 16일 광양에서 국군 15연대 기습, 600여명을 살상하고 700여명의 포로를 잡았다가 교육 후 방면함.

1950년 46세
1월, 군경토벌대의 대대적인 동계공세로 북한에서 내려온 1,3 병단 괴멸과 함께 이현상의 제2병단도 큰 타격을 입음.
3월 서울의 남로당 지도부 김삼룡 이주하 정태식이 체포되면서 지리산유격대 고립 심화.
6월 중순, 칠십여명의 잔존대원을 이끌고 지리산을 떠나 북상 시작.
연락두절로 한국전쟁 발발 사실을 모르는 채 한달여 전투를 계속하던 중 무주 근방에서 전쟁 발발 사실 확인.
7월 하순 무주에 진주해 인민군과 조우, 대전의 인민군 전선사령부로 부터 낙동강전선을 넘어 대구 팔공산을 점거하고 유격투쟁을 하라는 지시를 받음.
8월 1일 구십여명의 유격대를 이끌고 낙동강을 도하, 두 달간 미군부대를 습격, 수백 명 이상을 사살하고 수많은 군수물자를 파괴하고 백명 이상의 포로를 잡았다 풀어주는 등 대구 주변 미군지역을 휩쓸고 다님.
10월초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선이 끊기면서 북으로 후퇴 시작. 인민군 낙오병, 인공 부역자 등 이천여명의 피난민을 호위해 한 달 만에 북강원도 후평에 도착. 이승엽으로부터 남한유격대 총지휘권을 받음.
11월 10일 팔백육십 명 대원을 남부군 창설, 총사령으로 취임. 참모장 박종하, 정치위원 차일평 등을 선임. 15일 아침 남쪽으로 출발함.
12월 중순 인민군 총사령부에서 남한 유격대를 6개 독립지대로 나누고 이현상을 제 4지대장으로 임명하는 새로운 명령을 내렸으나 남부군에는 전달되지 못함.

1951년 47세
1월 중순, 소백산에 자리 잡고 이웃한 문경군과 단양군 도시들을 공격, 십일간 죽령을 점거해 미군의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힘.
2월 미군 공습에 밀려 남하 중 세균전에 노출, 백여명의 대원을 재귀열로 잃고 속리산에 들어감.
3월 속리산 남부 지역의 갈평 등 5개 산간 마을을 점거하고 주변도시들을 공격, 삼개월간 연전연승을 거둠. 기관지 '승리의 길'창간.
5월 26일 충북도청 소재지 청주 기습, 여러 관공서를 불태우고 청주형무소의 좌익수 백사십이명 석방시킴.
6월초 민주지산에 자리 잡고 인근 도시와 경부선의 군용열차를 습격함. 두 갈래로 나뉘어 남하하면서 덕유산 일대와 경상북도 내륙의 도시들을 기습, 막대한 피해 입힘.
6월 중순 덕유산 송치골에서 남한 6개 도당 위원장을 소집해 남한유격대를 하나로 묶는 남부군 결성에 합의, 총사령관으로 취임함. / 이후 수개월간 덕유산과 지리산 일대에서남부군의 공격으로 군경이 막대한 피해를 입음.
8월 14일 참모장 박종하, 가회전투 도중 사망. 남부군은 지리산으로 들어감.
8월 31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남한을 5개 지구로 나누고 이현상을 전남과 전북,충남과 경남 등 남한 남부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제5지구당 위원장으로  임명하나 연락 두절로 일 년 후에야 지리산에 도착하게 됨.
11월 중순, 북한의 밀사가 도착 1950년 12월 인민군 총사령부에서 내린 독립지대령을 전달, 이미 무효화된 명령에 따라 남부군을 해산하고 독립지대4로 재편성함.
11월말, 군경토벌대의 제1차 동계공세 시작됨. 중부전선에서 내려온 국군 3개 사단과 경찰 등 사만병력이 지리산을 포위하고 한번에 이주일씩 세차례에 거쳐 총공격 감행.

1952년 48세
1월 18일 대규모 군경토별대에 쫓기던 지리산 일대 유격대와 좌익피난민 등 이천여명 대성리 골짜기에서 포위됨. 미군의 네이팜탄과 폭격으로 천명이상 죽거나 체포됨. 독립 4지대도 한달 전 사백명이던 대원이 백오십명으로 줄어듦.
8월 1일 조선노동당 제 94호 결정서 '미 해방지구에 있어서의 우리당 사업과 조직에 대하여'가 남하 도중 체포되어 전향한 북한 연락원에 의해 도차됨. 이현상, 지리산 일대 남부 전역을 지도하는 제 5지구당위원장으로 취임. 명령서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상선연락대 보내나 속리산에서 전멸.
12월부터 군경토벌대 2차 동계공세시작, 삼개월간 제5지구당 산하유격대 전체에 치명적 타격입힘.

1953년 49세
3월 하순 북한에서 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 출신들에 대한 체포 시작. 일제시대부터 전향해 일본과  미국의 간첩으로서 남한의 혁명역량을 고의로 파괴시킨 혐의로 조사 받음.
7월 27일 미국과 북한 사이의 휴전협정이 타결. 산중의 도당 소속당원들 하산 지시. 무장유격대원 일부도 하산 지시. 이현상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간호요원 하수복을 하산시키나 화개장터에서 체포됨.
8월 3일 이승엽등 여덟 명의 남로당 지도부, 미제의 간첩이라는 명목으로 처형되고 연금 상태에 있던 박헌영도 정식으로 구속됨.
8월 26일 제5지구당 조직위원회 개최, 남로당의 종파주의 잔재를 청산하기위한 자아비판 시작. 이현상 미제간첩 이승엽의 지령에 따라 남부군 결성하고 정규군식 부대 운영으로 대원들을 소모했으며 당 간부로서 모범을 보이지 않고 하수복과 연애했다는 등의 비판을 받음.
제5지구당 해체되고 이현상은 평당원으로 하산하여 지하에서 활동하라는 결정이 내려짐. 수십명의 직할 유격대도 도당 부대로 흡수, 분산됨.
9월 18일 경찰 수색대, 오전 열한시 빗점골 합수내 옆에서 이현상의 시신 발견. 국군 수색대, 전날 저녁인 17일밤 여덟시에 자신들이 사살했다고 주장.
이현상의 시신, 이십일간 서울 창경원 등지에서 전시된 후 10월 8일 화개장터 근처 섬진강 백사장에서 경찰토벌대장 차일혁에 의해 화장되어 섬진강에 뿌려짐.

1968년 사후 15년
평양신미동에 조성된 애국열사릉에 만들어진 가묘에 안장. 제1호 열사증 추서 받음.

1990년 사후 37년
8월, 북한 정부로부터 조국통일상에 추서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