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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진 지리산 이야기/제밌지.지리야그.!

빨치산 이 현상

 

남부군 총수 이현상

 

--지리산 빗점골에서 사살되다

 

한국 현대사 비극의 주인공 이현상이 있습니다.  

 

[그의 직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남부군총사령관 이현상 빨치산의대명사]

지리산 토벌대 백야전사 또는 남경사 벼락부대에의해 이현상을 비롯한 빨치산이 최후를 맞았던 장소.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고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의 고대법학과를 나온인물 이현상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영웅','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 등으로 빨치산부대 실록인 '남부군(南部軍)'을 쓴 이태(李泰)가

기록하고 있다.

 

이현상을 사살한 당시 연대장 차일혁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빨치산 하면 이현상이요, 이현상 하면 곧 빨치산이 연상될 만큼 이현상은 빨치산의 대명사이다.

자신이 신봉하는 이데올로기를 따라 북에서조차 외면당하면서 고립무원 속에 끝까지 버틴 외로운

빨치산 이현상........'

 

그는 남한에 잔류한 공산잔당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간 뒤 53년 9월까지 햇수로는 6년에 걸쳐 지리산에서

유격투쟁을 주도해왔다.
그는 지리산 빗점골 너럭지대에서 총탄에 맞아 숨진 시체로 발견되어 화개장터 앞의 섬진강변에서 화장되어

사라졌다.

 

 


                             빗점골이라는 숨은 골짜기가 있다. 지리산의 수많은 골짜기 가운데 아마도 가장 깊고깊은 곳에 숨어있는 계곡으로 짐작된다.

"지리산의 빗점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게 "남부군"이다. 한 시대의 획을 그을만한 빨치산의 행적이 가장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곳이 바로 빗점골이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했던 곳이기에 이곳 빗점골이 갖는 한국 현대사의 의미는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빗점골은 52년 초여름 즈음 빨치산들은 이곳에서 남로당 간부(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등이 참가)와 각 지구 유격대 사령관들이 회의를 열고, 이른바 5. 25결정(각도당을 해산하고 지구당으로 개편할 것에 관한 결정)을 토의한 곳이며, 53년 9월 6일에는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의 주재하에 지구당을 해체할 것을 결정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이 회의에서 이현상은 사령관에서 평당원으로 강등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하나 자세한 내용은 알수 없다. 빗점골은 그 자신이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 곳이기도 한데, 그가 토벌대에 의해 사살된 곳은 빗점골의 너덜지대로 알려지고 있다. 이 너덜지대는 "합수내 흐른바위"라고도 하는데 지리산의 가장 깊은 골짜기인 빗점골이 다시 절터골과 산태골을 빚어내는 곳이기도 하다.

 이현상--고독한 공화국 영웅  이현상--

1906 충남 군산군 군북면에서 남
1925 중앙고보 재학중 조선공산당 창설에 참여
1927 보성전문 법학과에 들어감
       해방후 박헌영등과 조선공산당 재건, 남로당 연락부장을 맡음
1948 지리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시작
1951 남한 빨치산의 공식적인 총수가 됨
1953 지리산 빗점골에서 토벌대에 사살

지리산 누비던 빨치산 대장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 '외로운 방랑자' '고독한 공화국 영웅'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 당시를 몸소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남부군>이란 수기를 펴내 일반의 관심을 끌어모았던 이태(본명 이우태)씨가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 술회하는 말들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이현상만큼이나 '전설'속에 가리워 있고 개인의 역정이 대중에 전달되고 있지 않은 인물도 드물 듯싶다. 따라서 그에 대한 대중의 '궁금증'도 그만큼 드세다 할 수 있다. 이현상의 족적이 뚜렷이 전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상식적이지만, 지리산 첩첩산중에서 그의 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활동을 펼쳤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며 그가 추구하였던 이데올로기는 이사회에서 '금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몇 안되는 살아남은 그의 측근들초자 이사회의 전면에 나서려 하지 않은 체 너나없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현상은 이렇게 묻혀온 존재이다. 그에겐 인물사진 한 장도 변변히 남아 있지 않다.

  <남부군>이후 최근들어 이현상의 실체에 대한 접근 노력이 부분적으로나마 있어 왔고 또 약간의 성과를 보았다. 그러나 이 또한 객관적 자료의 턱없는 부족으로 말미암아 곳곳에서 '이설'들이 등장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현상은 1953년 9월 18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토벌대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토벌대장이었던 차일혁 총경(58년 사망)이 남긴 기록은 이렇다.

  "18일 오전 11시경 잠복중이던 돌격조 중 한조가 갈미봉 방면으로부터  3명 이상의 적이 개인거리 10m 간격을 두고 남하하는 것을 발견하고 약 15m까지 근접하였을 때 일제사격을 했다. 적이 당황해 침입로쪽으로 도주하려 할 때 대원중 이현상의 얼굴을 아는자가 '이현상이 도주한다'고 고함쳤으며 이에 전대원이 아연긴장, 맹추격하여 11시 5분부터 약3분간 교전 끝에 이현상은 사살되고 잔병은 분산도주했다."

  당시 <제5지구 로동신문>주필로 이현상과 지리산에서 줄곧 같이 생활한 송영회(81, 일명 송시백, 현재 경기도 수원시 거주)씨는 이현상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회고한다.

  "지리산 비트에서의 이현상과의 마지막 만남은 9월 18일 오전에 있었다. 그는 '지난밤 잠자리가 뒤숭숭했다'며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난 지하로 들어가네, 진주로 가겠네'하였다. 나는 '어떻게든 내가 일본으로 빠져나가 자네를 돕겠네'라고 말했다. 헤어져야 할시간이 됐다. 나는 내가 아끼던 포킷용 <소련공산당사>와 일어판 노어사전을 그에게 전해줬다. 그는 내게 자신이 항상 즐기던 마도로스 파이프를 쥐어주었다. 그리곤 그가 말했다. '또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싱거운 소리하네'라고 대꾸했지만 '이 사람 마음이 약해진 게로구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이날 이현상은 동료들의 안내를 받으며 마을쪽으로 내려갔다. 송씨는 산을 타고 넘어 뱀사골쪽으로 갔다. 그리고 다음날 송씨는 '이현상이 사살됐다'는 삐라가 비행기에서 뿌려지는 것을 받아보았다.

 이현상의 죽음에 대해 토벌대의 발표는 조작된 것이며 '사살'이 아니라 '자살'이었을지도 모근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기는 하나 그 주장을 뒷받침할 많나 근거는 아직 없다.

  이현상은 사망 당시 줄이 선 미제 사지옷에 깨끗한 군용 농구화를 신고 있었는데 주머니에는 염주가 들어 있었다. 그의 수첩엔 한시 몇수가 적혀 있었다. "지리산의 평정없이 남한의 편정없고, 이현상을 잡지 않고는 지리산이 평정될 수 없다"며 이현상을 생포하도록 지시했고 그를 보고 싶어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죽은 이현상을 보려하지 않았다. 이현상과 동향인 임영신, 유진산씨 등이 그가 숨졌음을 확인했다. 그의 유품은 창경원에 전시되었다. 이현상의 죽음을 놓고 군과 경찰사이에 낯뜨거운 공훈 다툼이 벌어졌고 결국 내무부장관, 치안국장, 서남지구 전투사령관이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현상에 얽힌 설화는 한정된 범위 안에서 구전되고 있다.

  이현상은 축지법을 쓴다느니, 몇길 담장을 훌쩍훌쩍 뛰어넘는 다느니 하는 소문이 지리산 언저리에서는 짜하게 퍼져 있었다. 실제로 그는 토벌대를 농락하듯 신출귀몰했다. 앞서 언급한 송씨는 이렇게 말했다.

  "한번은 벼랑 끝에 천막을 치고 이현상을 포함해 3-4명이 같이 자는데 새벽녘에 갑자기 총소리가 났어요. 순간 드러누운 채 벼랑으로 굴렀습니다. 한참 뒤 정신을 차리고 올라가 보니 이현상이 혼자있더군요, '어떻게 된거냐'고 물었더니  '뭔가 기분이 찜찜하고 소변도 보고 싶어 나와보니 권총을 빼 신호사격을 해서 적을 쫓았다'고 하더군요.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행동이 민첩한 데다 산중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위험을 간파하는 뛰어난 촉각이 온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어요, 같이 밥을 먹다 갑자기 자리를 옮기자며 뛰길래 멋보르고 쫓아가서 화를 면한 적도 두어번 있습니다."

  그는 또 포로를 살상하지 않았다고 한다. 토벌대 사이에는 "남부군에 잡히면 안 죽는다"는 말이 퍼져 있었다. 그는 포로에게 각서를 쓰게 한 뒤 총만 빼앗고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토벌대장이었던 차일혁 총경은 "이현상이 고도의 심리전을 펴는 것인지, 아니면 철학이 그런 것인지 궁금하다."는 말을 되뇌이곤 했다고 한다. 그는 적군 사병에 대해 적개심을 가졌다기보다는 '같은 피해자'란 생각을 했던 것 같다는 것이다.

  조그맣고 뚱뚱한 몸집에 팔자 콧수염을 기른, 온후한 중년신사 타입의 이현상은 냉혹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한편으론 깊은 정이 있었다. 남부군이었던 김웅씨는 이런 기억을 털어놓았다.

  "어느날 행군에 지쳐 짐을 간신히 지고 가는데 웬 중년남자가 '짐을 달라'더니 대신져 주었다. 얼마쯤 그러고 가는데 뒤에서 청년들이 달려와 '선생님, 이게 무신 일이십니까' 하며 짐을 내려놓는 거였다. 알고 보니 그가 이현상이었다."

  이현상은 1906년 충남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에서 3백석쯤하는 부농 이면배의 4남 2녀 중 다섯째(아들로는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씨가 일제 때 면장을 지냈는데 생존시 면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그 비가 지금도 금산-대전간 도로변에 서 있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된 맏형과 둘쩨형도 면장일을 보았고, 셋째형은 6.25 뒤 행방불명되었다. 어머니 원주 김씨는 "우리 현상이 죽지 않았다."며 아들을 기다리다 지난 75년 90살을 일기로 생을 마쳤고, 인근으로 출가한 누이들도 모두 세상을 떴다. 조카들만이 서울과 전주 등지에서 살고 있다.

  이현상은 부인 경주 최씨와의 사이에 딸 무영과 아들 극 남매를 두었는데, 이들의 행방이 알려지지 않다가 얼마 전 북한에서 발행한 잡지에 이현상 관련기사가 실린 가운데 아들 극의 입당보증을 김정일이 서주었다는 내용이 나온 것으로 보아 아들은 북한에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인 최씨도 북한에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현상의 호적에 34년생으로 둘째딸로 올라 있는 문영씨는 그의 소생이 아니라 갈 곳 없어 데려다 기른 의붓딸이다. 실제 나이가 73살인 의붓딸은 이현상의 고향마들에 지금도 살고 있다. 이 할머니는 '그분이 오갈 데 없는 나를 거두어 주었다'"고 말하곤 한다.

  지리산에서 이현상의 시중을 들어주었다는, 당시 20대 초반이었고 가냘프고 작은 몸매의 '하 여인'은 53년 여름께 산에서 내려와 수용소를 갇혔다가 얼마 안 있어 풀려났다고 한다. '하 여인'은 바로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데 이 아들이 이현상의 자식이며 현재 부산지역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하 여인'과 이 아들은 자신들과 이현상과의 관계를 극구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하 여인'은 89년초 그동안 청주보안감호소에 줄곧 수감돼 있다가 76세의 나이로 병사한 이현상 부대의 정치위원 김삼홍의 장례식에 조용히 모습을 나타냈었다.

  이현상의 고향마을 외부리엔 그의 생가와 살림집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 마을에 눌러앉아 사는 그의 일가는 이제 거의 없고, 그에 관한 기억도 아슴푸레하게 사라져가고 있다.

  이현상은 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창고보에 다니다 중도에 그만두고 서울 중앙고보로 옮겼다. 중앙고보 재학때인 1925년 박헌영등의 조선공산당 창설에 참여했고, 1926년 6·10만세사건 당시 유인물을 배포하다 출판법위반 협의로 경성지방 법원 검사국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듬해인 1927년 보성전문 법과에 들어간 그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산하의 학생부의원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학생야체이카회, 독서회 등에서 상무위원·상무집행위원·책임비서 등으로 활동하면서 반일동맹휴학을 주도하다 일제의 대대적인 공산당 검거에 걸려 1928년 구속됐다. 이것이 세칭 'ㄱ당학생사건'이었다. 당시의 일본경찰 신문조서를 보면, 이현상은 1927년 4월 중국 상하이에 건너가 한인청년회에 입회하여 '사회주의 선전에 전력'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재미있는 것은 '피의자 소행조서'에서 "일견 온순함을 가장하고 있으나 음험한 자로서 과묵하며 의지가 대단히 강고" 하다고 기재돼 있고 "극력한 사회주의자로서 개전의 가능성은 없음"이라고 적혀있다.

  또 신문조사에 따르면 이때 그는 서울 익전동에서 처와 1남 1녀와 함께 하인 한사람을 두고 생활하고 있었는데 생활비와 학비는 형이 대주고 있었다. 이현상은 치안유지법·보안법·출판법 등 위반혐의로 기소되었는데  ML당사건까지 겹쳐 징역4년을 살게 된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박헌영·김삼룡 등과 함께 지하활동을 하면서 당 재건을 위해 경성콤그룹을 결성했다. 그는 이 시기에 집에서 돈을 끌어다 공산주의 운동 자금으로 썼다. 2차대전  말기 일제의 발악이 심해지고 동료 공산주의자들의 투옥·전향이 속출하자 이현상은 한때 지리산으로 숨어들기도 했다. 일제하에서 그가 감옥에서 생활한 기간은 12년여였다. 해방이 되자 이현상은 박헌영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했고 이후 남로당으로 개편되고 나서는 연락부장을 맡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해나갔다. 이 무렵 이현상의 처는 서울에서 자식 둘을 데리고 하숙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남한에서 공산당의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박헌영·이승엽등과 함께 평양으로 간 이현상은 그곳에서 머물다 48년 당의 결정에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부터 5년 동안의 빨치산 투쟁이 시작된다.

  지리산속에서 6·25를 맞은 이현상은 낙동강 전선으로 옮겨가 후방 교란작전을 폈다. 50년 9월말 인민군이 패퇴하자 이현상 부대 역시 북상해 후퇴길에 올랐다. 그해 11월 강원도까지 올라갔던 그와 그의 부대는 다시 남하하라는 명령에 따라 혹한을 헤치고 단양 인근 소백산 지역으로 내려온다. 연합군에 기습작전을 펴며 속리산-민주지산을 거쳐 51년 5월 덕유산에 이르게 된다. 이해 7월 이곳에서 이현상의 주재하에 처음으로 충남·북, 전남·북, 경남·북의 '남한 6도 도당위원장회의'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이현상은 남한 빨치산의 공식적인 총수가 된다. 각 도당 유격대는 남부군 사령부의 지휘하에 들게 된다. 이때부터 남부군은 전황의 변화에 따라 지대편성→지구당체제로의 개편→지구당 해체의 과정을 밟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현상이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는 반면, 한편으로는 남부군 내부의 노선싸움 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말기에 들어서는 이현상이 반대파에 의해 평당원으로 강등되기까지 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설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아 그 사실여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현상은 53년 전쟁이 끝난 상황에서 더 이상의 빨치산 활동이 무의미하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자 새로이 지하조직운동을 모색하려던 과정에서 최후를 맞은 것으로 보인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현상이 더 이상 '전설속의 영웅'이 아니라 '역사속의 인물'로서 제자리를 찾게 하는 작업일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의 잣대에 당연히 그의 사상적 배경이 가미돼야겠지만 무엇보다도 흩어져 있는 '사실'들을 꿰어 맞추는 작업이 우선돼야 할 것이다. 그런 바탕 위에서라야 분단과 전쟁이라는 우리 시대의 비극적 상황속에서의 그의 역할이 정확히 가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회색 인조털을 입힌 반코트를 입고 눈보라치는 산마루에 서서 저편 언덕을 바라보고 있던 이현상의 어딘가 우수에 잠깃 듯하던 옆모습‥…"에서 이제 그 우수는 무엇이었는가를 역사가 밝혀야 할 때이다.

  

  --이글은 1989년 한겨레 신문에 연재된 발굴 한국현대사의 인물에서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