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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진 지리산 이야기/제밌지.지리야그.!

[스크랩] 고독하고 외로운 독립운동가 이현상.[사실 이사람 좌우 선택은 없엇던 것 같다]

인물현대사-반외세 민족주의자- 독립운동가 이현상

 

이현상은 8.15이후 미국과 소련을 등에 업은 남.북한 권력으로부터 외면받은 고독한 인물이였다.

 

그의 내면의 민족사상과 선택은 아마도 미국과 소련군정을 앞세운 이승만.김일성권력에 대한 거부이며, 지리산빨치산 투쟁으로 대변되는 민중과의 연대를 통한 민족자주항쟁이였다고 본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을 거부하며 민족자주독립과 민족통일를 위하여 처절하게 항쟁하다 죽어간 이름없는 민족영령들을 잊지 말아야 하며, 그들의 소원인 민족통일을 화해협력과 민족대단결이라는 자주평화적인 방법으로 실현해야하는 우리의 민족사적 사명이라 할 것이다. 







일제하 반일투쟁으로 투옥된 이현상

 

남한 빨치산의 공식적인 총수였다. 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고창고등보통학교에 다녔으나 중퇴하고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중앙고보 재학중이던 1925년 조선공산당 창설에 참여했으며, 1926년 6·10만세사건 때 유인물을 배포하다가 출판법 위반 혐의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27년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여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산하의 학생부위원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학생 야체이카회, 독서회 등에서 상무위원·상무집행위원·책임비서 등을 맡아 활동했다. 1928년 8월 반일동맹휴학을 주도하던 중 일제에 검거되어 지하조직인 세칭 'ㄱ당 학생공산당사건'에 연루된 혐의 및 치안유지법·보안법·출판법 등의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4년간 복역했다.

 

출소 이후 박헌영·김삼룡 등과 함께 지하활동을 하면서 경성 콤 그룹을 결성하여 당 재건을 준비했다. 8·15해방 후 이들이 중심이 된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했고 남조선노동당으로 개편된 후에는 연락부장 등의 요직을 맡았다. 남한에서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됨에 따라 박헌영·이승엽 등과 함께 평양으로 갔으나 1948년 당의 결정에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시작했다. 6·25전쟁중인 1950년 9월 전황이 불리해지자 조선인민군과 함께 그의 부대도 후퇴하여 강원도까지 북상했다. 같은 해 11월 다시 남하하라는 당의 명령에 따라 소백산지역으로 내려왔으며 1951년 5월 덕유산에 도착했다.

 

같은 해 7월 이곳에서 그의 주재로 최초의 '남한 6도 당위원장회의'가 열렸고 이때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그는 '공화국 영웅'의 칭호까지 받았으나 1953년 9월 18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빨 치 산   총  수   이 현 상


 지리산 빨치산의 삶을 다룬 자전수기  '남부군'을 펴내 이땅에 '빨치산 문학'이란 장르문학의 불을 지폈던 이태씨는 자신의 곡절 많은 삶을 , 놀라운 기억력과 치밀한 문장으로 담아내, 세계 유격전사상 유례없이 처참했다고 하는 지리산 빨치산 운동의 진상을 최초로 일반에게 소개한 장본인이다. 이태씨의 '남부군'은 이후 이병주의 '지리산' 조정래의'태백산맥' 김원일의 '겨울 골짜기'등의 대하소설에 문학의 원전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또 '남부군'은 빨치산 총수 이현상이란 잊혀진 삶에 진한 관심을 보여 주기도 했는데 이태씨의 말에 의하면 "이젠 잊혀지고 지워진 역사를 다시 펼쳐야 되지 않겠느냐"고 한다.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이태씨는 연전에 타계하였다.

 

남과북의 역사에서 처참하게 말살된  비운의 군상들이 있다. 이른바 남로당...  박헌영.이승엽.조일명.임 화.정태식.이강국...  그중의 한사람, 남부군의 히어로 이현상. 그가 지상에 남긴 흔적은 안개처럼 희미하고 그 죽음조차 수수께끼에 묻혀 있다. 아직도 지리산 빗점골 자락에 숨겨진 그 진실은? 이현상은 현재 북한 열사능 1호 묘역에 묻혀 있으며 그의 자녀들은 건재하게 북한에서 살고 있다.

 

대한제국의 명맥이 경각에 달렸던 1905년 이현상은 충남(당시는 전북)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의 명문인 전주 이씨 진사 이면배의 4남으로 태어났다. 고창고보를 거쳐 서울 중앙고보로 전학한 그는 그곳을 중퇴하고 보성전문 법과에 진학하게 되는데 고보(지금의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국권은 군국주의 일본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었고 1925년에는 박헌영의 밑에서 김삼룡 등과 더불어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하면서 조선공산당의 핵심인물로 부상한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지 8년 후의 일이다. 1928년 조선공산당(별칭 ML당)이 일본 경찰의 발본색원적 탄압으로 붕 괴되고 그 명맥마저 소멸되자 박헌영을 정점으로 이관술, 권오직 등과 함께 '경성 코뮤니스트 클럽(약칭 경성 콤 클럽)'을 만들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제 경찰의 발악적 탄압이 시작되어 동료 공산 주의자들의 투옥 전향이 속출하자 출옥 중이던 그는 한때 지리산으로 은신하기도 하였다.

 

해방과 함께 그는 지상으로 나와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했으며 그것이 남로당으로 개편된 후엔 간부부장이라는 요직에 올랐다. 남한에서 공산당 활동이 비합법화되자 동료 당원들은 뒤를 이어 월북 도피했다. 모스크바 유학차 월북중 반김일성파로 지목되어 다시 서울로 피신해왔던 이현상은 북한정권의 요직에 참여한 동료들을 외면하고는 48년 11월 겨울이 휘몰아쳐 오는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경성 콤 클럽 시절부터의 동료인 이승엽이 일제시대 전향과 타협의 굴절된 경력을 가진 데 대해 이현상은 그 가혹한 일제 탄압 하에서도 일체의 전향이나 타협을 몰랐고, 이승엽이 한때 평양 김일성 정권의 각료 반열에 올라 있는데 비해 이현상은 김일성을 거부하여 자진해서 남한 빨치산에 투신한 터였다.

 

그리고 5년 후 그 지리산에서 파란 많던 생애를 마친다. 북한정권은 53년 2월 5일 이현상에게 '공화국 영웅'의 칭호를 수여했다. 히틀러가 롬멜장군에게 '국장'의 영전을 내린 고사를 연상케 하는 서훈이었다. 남한 빨치산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이현상...  그는 그가 남긴 수다한 '전설'과는 달리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가 대표한 남한 빨치산의 운명처럼 지구상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이루지 못할 아집 속에 죽어갔고, 그 주검조차도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원래가 과묵했던 그가 더구나 그때의 환경 속에서 어떤 반권적 언동을 내색한 적은 물론 없었을 것이다. 방랑객처럼 산맥을 표류하다 전남유격대의 총탄에 쓰러진 남해여단장(이청송), 그 사람처럼 모든 것 이 수수께끼일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외로운 방랑자였다는 것이다.

 

빨치산이라는 배경이 사라지고 일체의 발언권을 상실한 국내파(남로당계)는 참으로 어이없게 소멸되고 말았다. (월북한 박헌영 이승엽 등은 김일성에 의해 반란음모 혐의로 체포 사형된다) 그러나 아득히 전선 후방의 산악을 가고 있는 빨치산 대열 속에서 그것을 상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혹은 이현상만은 그것을 예측했었을 지도 모른다. 예측했다 해도 그가 갈 길은 산맥 이외에는 없었다. 이현상이 사살된 53년 현재 그는 북에서도 남에서도 버림받은 천애의 고아가 돼 있었다. 방향감각을 상실했을 그를 기다리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이승엽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이 평양에서 사형대의 이슬이 되는 바로 그 시각에 이현상은 지리산 빗점골에서 박영발(전남도당위원장) 등 교조주의자들에 의해 단죄되고 평당원으로 강등 당한 다음 뒤이어 수수께 끼의 총탄에 쓰러진다. '미국간첩 운운'의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이 되느니 보다는 빨치산 수령으로 최후를 마친 것이 소년시절부터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어 평생을 그 길로 살아온 그로서는 오히려 소망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그는 비운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나는 훗날 토벌 군경들 혹은 지리산 주변 주민들 사이에서 이현상이 축지법을 쓰느니 몇 길 담장을 훌훌 뛰어 넘느니 하고 무슨 신통력을 가진 사람처럼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는 그냥 중후한 인상을 주는 평범한 중키의 사나이였다. 그냥 묵직하고 과묵한 중년신사 일 뿐이었다. 그는 모든 남부군 대원들로부터 지극한 흠앙을 받고 있었으며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언제나 절대적인 신의 계시처럼 대원들에게 받아들여 지고 있었다. 누구도 듣는 데서나 안듣는 데서나 그의 이름은 커녕 직함조차 부르는 법이 없었고 그저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그가 사용했던 노상명, 혹은 노명선(산중에서 사용)이라는 가명조차 아는 대원이 거의 없었다. 말단 대원이던 나로서는 그와 대화할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진회색 인조털을 입힌 반코트를 입고 눈보라치는 산마루에 서서 첩첩 연봉을 바라보고 있던 이현상의 어딘가 우수에 잠긴 듯하던 옆 모습은 지금도 선명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이태의 남부군에서 발췌 - 남원시 홈페이지에서)



               안치환 외 (합창

출처 : 국민모임
글쓴이 : 국민모임깃발아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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