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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진 지리산 이야기/제밌지.지리야그.!

빨치산 대장 이현상의 삶과 투쟁

이현상

  • 글쓴이: 무심재
  • 조회수 : 60
  • 09.01.06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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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대장 이현상의 삶과 투쟁.

1992년 북한이 공개한 이현상의 사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 '빨치산의 전설적 지도자' 등의  수많은 수식어를 가진 이현상. 그의 삶은 과연 어떠했을까?
 실제로 그의 삶, 투쟁, 죽음은 여전히 수많은 수수께끼에 남아
 있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여러 자료들을 모아, 이 문서를 정리한다.
                                                                         2001년 정호.

    <<  차  례 >>

    1. 이현상의 생애
    2.
이태의 <남부군>을 통해본 그의 투쟁과 죽음.
    3.
군,경 토벌대의 설명에 따른 그의 투쟁과 죽음.
    
4. 이현상의 가족들의 삶.
    5. 인간 이현상.
    6. 참고자료

 

[사진] 이현상의 유일한 사진. 1992년 북한에 의해 공개되었다.


1. 이현상의 생애.

 이현상은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인 1905년 전북(현재는 충남)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에서 4남2녀중 다섯째(4남)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지역에서 대를 이어온 전주이씨 양반가였으며, 그의 부친은 부농이었던 진사 이면배였다. 그는 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후 고창고보를 다니다, 서울로 전학 1927년 중앙고보를 졸업샜다. 중앙고보 재학중이던 1925년부터 박헌영등과 함께 공산당운동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1926년 6.10만세사건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기도 했다.

 보성전문에 진학하여 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등에서 상무위원, 책임비서등으로 활동하였으며, 1927년 휴학중 상해로 건너가 망명 청년들의 모임 '한인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한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그는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1928년 8월 구속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그는 일제 식민치하에서 총 12년간의 감옥생활을 했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조선공산당이 해제되자 경성꼬뮈니케클럽(경성컴)을 만들기도 했으며, 해방직전 일본경찰의 검거를 피해 지리산으로 입산한다. 해방이후 지리산에서 나와 조선공산당 재건에 적극 가담하며, 남로당 연락부장, 간부부장을 맡았다. 미군정에 의해 공산당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박헌영등과 함께 월북하였으며, 월북후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난다. 1948년 다시 서울로 내려온 그는 빨치산투쟁을 위해 그해 11월 지리산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가 남한으로 다시 내려온 원인은 크게 두가지설이있다. 하나는 스스로 남한 빨치산 운동을 지도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설이 있고, 당시북한정권과의 갈등을 피해 남한으로 내려왔다는 설이있다)

 이후 그는 '조선 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 으로서 지리산등지에서 치열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며, 그에 대한 수많은 전설들을 만들어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후 경상도,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전역에 인공이 수립되자 부대를 이끌고 지리산에서 하산하였으나 미군의 인천상륙과 함께 다시입산하여 빨치산 투쟁을 전개한다. 1951년 7월 '남한 6개도당 위원장회의'를 주재하면서 그는 공식적으로 남한 빨치산의 사령관의 위치에 오른다.

 1953년 한국전쟁의 휴전과 함께 북한에서는 남로당계열이었던 박헌영, 이승엽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된다. 그해 8월 6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열린 제5지구당 조직위원회와 결정서9호, 9월 6일의 결정서10호에 따라 당시 제5지구당은 해체되고 위원장이었던 이현상은 평당원으로 강등된다. 또한 남부군의 핵심부대였던 제5지구당 요원들과 '김지회부대'를 각 도/군당에 분산시킴에 따라 그는 빨치산 지도자로서의 모든 권한을 박탈당한다. 당시의 조직위원회를 이끌던 이는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 등이었다.

이현상이 사망한 지리산 빗점골 너덜겅. 
[사진] 이현상이 죽은 지리산 빗점골 너덜겅.

1953년 9월 18일(혹은 17일, 15일) 그는 지리산 빗점골 합수내, 너덜겅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의문의 총탄에 의해 사망한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그의 죽음에 대한 미스테리는 아직까지 풀리지 않고 있는데, 크게 보면 1) 군토벌대에 의해 2)경찰토벌대에 의해 3)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빨치산에 의해 등의 세가지 설이있다. 그를 사살한 공적을 두고 남한에서는 법정다툼까지 벌어졌는데, 법원은 경찰의 손을 들어주었다. 공식적으로 남한에서는 1953년 9월 18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경찰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것이 공식적인 기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빨치산 수기인 '남부군'의 저자 '이태'는 간접적으로 세 번째 설을 제기하고, 북한에서는 9월 17일 사망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생애와 죽음은 아직 많은 부분이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는 지리산 빗점골에서 총탄을 맞아 숨진 시체로 발견되어 화개장터 앞의 섬진강변에서 화장되어 역사의 뒷길로 사라졌다

 이현상은 그가 살아있던 51년, 이미 북한에서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고, 52년에는 자유독립훈장 제1급을, 53년 2월에는 영웅칭호를 받았다. 김일성은 지리산에 있는 이현상에게 영웅훈장 약장을 보내기도 했다. 그후 이현상이 죽은후인 68년, 북한은 '혁명 애국열사'로 정식으로 선정되었다. 이때 이현상은 열사증 000001번으로 첫 열사증을 추서받아 혁명열사릉에 안장(가묘)되었다. 또 이현상은 90년 8월 조국통일상을 추서받았다.

 이현상은 최문기와 결혼, 1남3녀를 두었다 큰딸은 무영(茂永.23년생), 둘째는 외아들 극(剋.27년생) 둘째딸 문영(文永.34년생), 셋째딸이 상진(尙鎭.40년생)이다. 한때 남한에 그의 딸이 살고 있다는 설이 있었으나, 확인된 바로는 이현상의 가족은 월북하여, 북한에 정착하였다.

 그는 평범한 키로, 언제나 과묵하고 우수에 잠긴듯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대원들을 지극히 아끼고 솔선수범하였으며, 남부군뿐 아니라 빨치산 모든 대원들로부터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그가 축지법을 쓰고 날아다니기도 한다는, 신비한 인물로 전해지기도 했으나, 이런 민간의 소문들은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빨치산 투을 했는가를 보여준다 할 것이다.

 그는 일제시대, 조국독립운동으로 공산당운동에 뛰어든 이래, 평생을 혁명을 위해 투쟁하다 지리산에서 최후를 맞이한 빨치산의 전설적 지도자였다. 비운의 한국 현대사에서 그는 가장 고독하고 외로운 영웅이었고 지리산에서 자신의 삶을 불태운 혁명가였다. 처음으로



2. 이태의 <남부군>을 통해본 그의 투쟁과 죽음.

자신이 빨치산 대원 출신이며,  최초의 빨치산 수기인 <남부군>을 쓴 '이태'는 이현상의 삶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남과북의 역사에서 처참하게 말살된  비운의 군상들이 있다. 이른 바 남로당..박헌영.이승엽.조일명.임화.정태식.이강국..그중의 한사람, 남부군의 히어로 이현상.그가 지상에 남긴 흔적은 안개처럼 희미하고 그죽음 조차 수수께끼에 묻혀있다. 아직도 지리산 빗점골 자락에 숨겨진 그진실은? 이현상은 현재 북한 열사능 1호 묘역에 묻혀있으며 그의 자녀들은 건재하게 북한에서 살고있다.... (중략) ... 모스크바 유학차 월북중 반김일성파로 지목되어 다시 서울로 피신해왔 던 이현상은 북한정권의 요직에 참여한 동료들을 외면하고는 48년 11 월 겨울이 휘몰아쳐 오는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경성 콤 클럽 시절부터의 동료인 이승엽이 일제시대 전향과 타협의 굴 절된 경력을 가진 데 대해 이현상은 그 가혹한 일제 탄압하에서도 일 체의 전향이나 타협을 몰랐고, 이승엽이 한때 평양 김일성 정권의 각 료반열에 올라있는데 비해 이현상은 김일성을 거부하여 자진해서 남한 빨치산에 투신한 터였다. 그리고 5년 후 그 지리산에서 파란많던 생애를 마친다. 북한정권은 53 년 2월 5일 이현상에게 '공화국 영웅'의 칭호를 수여했다. 히틀러가 롬멜장군에게 '국장'의 영전을 내린 고사를 연상케 하는 서훈이었다.

<남부군>의 저자 이태
[사진] 빨치산 수기 <남부군>의 저자 이태

 남한 빨치산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이현상... 그는 그가 남긴 수다한 '전설'과는 달리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가 대표한 남한 빨치산의 운명처럼 지구상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이루지 못할 아집속에 죽어갔고, 그 주검조차도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 받은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원래가 과묵했던 그가 더구나 그 때의 환경 속에서 어떤 반권적 언동 을 내색한 적은 물론 없었을 것이다. 방랑객처럼 산맥을 표류하다 전 남유격대의 총탄에 쓰러진 남해여단장(이청송), 그 사람처럼 모든 것 이 수수께끼일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외로운 방랑자였다는 것이다. 빨치산이라는 배경이 사라지고 일체의 발언권을 상실한 국내파(남로당 계)는 참으로 어이없게 소멸되고 말았다. (월북한 박헌영 이승엽 등은 김일성에 의해 반란음모 혐의로 체포 사형된다)

 그러나 아득히 전선 후방의 산악을 가고 있는 빨치산 대열 속에서 그것을 상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혹은 이현상만은 그것을 예측했었을 지도 모른다. 예측했다 해도 그가 갈 길은 산맥 이외에는 없었다. 이현상이 사살된 53년 현재 그는 북에서도 남에서도 버림받은 천애의 고아가 돼 있었다. 방향감각을 상실했을 그를 기다리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이승엽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이 평양에서 사형대의 이슬이 되는 바로 그 시각에 이현상은 지리산 빗점골에서 박영발(전남도당위원장) 등 교 조주의자들에 의해 단죄되고 평당원으로 강등당한 다음 뒤이어 수수께 끼의 총탄에 쓰러진다. '미국간첩 운운'의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이 되느니 보다는 빨치산 수령으로 최후를 마친 것이 소년시절부터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어 평생을 그 길로 살아온 그로서는 오히려 소 망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그는 비운의 인물이었던 것이 다. 나는 훗날 토벌 군경들 혹은 지리산 주변 주민들 사이에서 이현상이 축지법을 쓰느니 몇 길 담장을 훌훌 뛰어 넘느니 하고 무슨 신통력을 가진 사람처럼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는 그냥 중후한 인 상을 주는 평범한 중키의 사나이였다. 그냥 묵직하고 과묵한 중년신사일 뿐이었다.

 그는 모든 남부군 대원들로부터 지극한 흠앙을 받고 있었으며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언제나 절대적인 신의 계시처럼 대원들에게 받아들여 지고 있었다. 누구도 듣는 데서나 안듣는 데서나 그의 이름은 커녕 직함조차 부르는 법이 없었고 그저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그가 사용 했던 노상명, 혹은 노명선(산중에서 사용)이라는 가명조차 아는 대원이 거의 없었다. 말단 대원이던 나로서는 그와 대화할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진회색 인조털을 입힌 반코트를 입고 눈보라치는 산마루에 서서 첩첩 연봉을 바라보고 있던 이현상의 어딘가 우수에 잠긴 듯하던 옆 모습은 지금도 선명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이태의 <남부군>에서... 

 이태의 <남부군>에 따르면, 그는 조선공산당의 한 축인 '남로당'의 핵심간부였으며, 북한의 김일성정권과 일정한 갈등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계속되는 빨치산투쟁의 소멸속에서 이현상은 북한에서 있었던 '남로당'계열 인사들의 처단의 흐름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나름대로 예측하였다. 그는 북한의 소환명령을 거부하였으며 평당원으로 강등된후 연금상태에 있다 북한의 지령을 받은 요원에 의해 지리산 빗점골에서 암살되었고, 그를 암살한 요원역시 군 수색대의 매복에 걸려 사망한 것이다. 북한의 공식기록에 따르면 이현상의 사망일은 9월 17일로, 남한의 공식기록인 9월 18일과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북한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그의 사망을 보고받은 것을 조심스레 집작하게 해준다.

 그가 제9호, 제10호 결정서를 통해 빨치산 사령관으로서의 직위를 잃고 평당원으로 강등당하였다 하더라도 그의 죽음이 북한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확증을 가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는 생전에 북한정권으로부터 당원의 최고영예인 '영웅'칭호를 받았으며, 그의 가족들은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각별한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다. 이는 북한정권에서 '이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어느정도 추측케 해주기 때문이다. 이현상의 죽음에 대한 이태의 설명은 공산당 내부의 갈등 - 북로당과 남로당, 해외파와 국내파 - 속에서 공산당으로부터 제거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정치적 해석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명확한 사료가 공개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므로 그의 의견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듯 싶다.
처음으로


 3. 군,경 토벌대의 설명에 따른 그의 투쟁과 죽음.

  사살기사

[사진] 당시 빨치산 대장 이현상을 사살했다는 신문기사.

휴전후, 당시 이승만대통령은 "이현상을 잡지 않고 지리산 빨치산을 토벌했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의 생포를 독려하며 거액의 현상금까지 걸었다. 이현상과 기백명의 잔존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1만8천명의 국군, 경찰부대가 지리산을 에워싸고 그의 사살에 불을 켜고 있었다. 이는 이현상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어느정도인지를 잘 알 게 해주는 일이라 하겠다.

이 작전에서 직접 이현상을 사살했다고 하는 당시 서전사 2연대의 연대장 차일혁 총경의 아들 차길진은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를 남겼다. 수기에 의하면,

'9월6일, 빗점골 부근을 수색하던 618부대는 원범리에서 빨치산 송덕룡 부대원 7명이 마을에 나타나 식량을 빼앗아 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창기 1소대장은 이들을 추격해 아침을 먹고 있을 때 기습, 김진영과 김은석을 생포했다. 심문 결과 두 사람은 제5지구당이 해체되기 전 이현상의 7인조 호위병으로 있었다. 둘에게서 다시 한번 제5지구당의 해체와 이현상이 평당원으로 강등돼 빗점골에 은신하고 있고, 조만간 경남도당으로이송될 것이란 정보를 입수했다. 나는 김진영과 김은석을 수색대에 편입시켰다.

9월17일, 나는 수색대로 하여금 빗점골 일대의 6개 지점에 매복케 했다. 수색대는 20시께 3∼4명의 공비들과 조우해 접전을 벌였으나, 공비들은 순식간에 도주하고 전과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빗점골에 공비들이 은신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됐고, 이현상의 은신 가능성도 높아졌다. 이미 호위병이 없이 거의 감금 상태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현상이지만, 평생을 공산주의 운동에 몸바쳐 온 한 인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작전 상황을 보고 받았다.

다음날인 18일 상오 11시, 김용식이 지휘하던 수색대로부터 전과보고가 있었다. "연대장님, 어젯밤에 전투가 있었으나 공비들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는데, 방금 일대를 수색하다가 늙은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김진영과 김은석에 의하면 이현상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엎드려 있는 시체를 발견하고 몇 발의 확인 사격을 하긴 했지만, 이현상은 등에 총을 맞고 죽은 것 같습니다. 어제 야간 전투 중 총에 맞아 죽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뒤에서 가슴까지 관통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총을 맞은 것 같습니다."

이현상 외 5명의 공비 시체와 노획 무기를 쌍계사로 옮겨 놓았다. 김진영, 김은석에 의해 일차로 이현상을 확인한 바 있으나, 본부 수색대 양회근 외 여러명의 재확인으로 이현상이 틀림없다는 판단이 내려졌을 때 나는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이현상의 시체는 40대 후반 중늙은이의 모습이었다. 줄이 선 미제 군복 바지와 농구화의 깨끗한 차림이었다. 군복 안에는 일기와 한시가 적힌 수첩, 가래가 있었고, 호주머니에서 염주가 나왔다. 그리고 허리춤 깊숙이 소련제 권총이 들어있었다. 그 권총은 매우 작아서 호신용으로나 쓸 수 있는 것이었다. 보급이 전혀 없던 빨치산들로서는 그 특수 소제 권총은 실탄을 구할 수 가 없어서 무기로써는 전혀 가치가 없었다.'

이 차일혁의 수기는 이현상이 누구의 총에 의해 사살되었는지를 밝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 사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여운을 남기고 있다.


한편, 국군 남경사 역시 이현상을 자신들이 사살했다는 내용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남경사 56연대 수색대원 오동식 상사가 이끄는 매복조가 9월 15일 빗점골에서 이현상을 사살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에 따라 국군은 경찰과 치열한 훈장다툼을 벌인다.

'달아난 공비들을 추적하던 오동식 상사는 큰 바위 위에 뛰어올라 사방을 둘러보다 바위 틈에 웅크리고 있는 공비 한명을 발견하고, "손들엇!" 하고 소리쳤다. 그 공비는 당당한 태도로 고개를 돌리고는 "군군이냐, 경찰이냐?"고 물었다. 오상사는 국군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장교를 불러라. 협상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권총을 빼들고 오상사 쪽으로 다가왔다. 오상사는 "권총을 버리라"고 경고했으나 그가 불응하자 위험을 직감하고 급히 카빈총을 발사하여 사살했다.

 당시 남경사 측은 빗점골에서 경찰부대 수색대가 이현상을 사살했다는 소문을 듣고 확인한 결과 그것이 바로 오상사가 사살한 공비임을 뒤늦게 알았다면서 공은 자신들이 세운 것이라고 육군본부에 보고했다. 오상사가 이현상을 몰라 그냥 버려둔 시체를 며칠 뒤 가져갔다는 주장이었다. 대검(帶劍)이 없었던 오상사 일행은 정체를 알 수는 없으나 거물급으로 보이는 문제의 빨치산 목을 자르려고 목에 총을 난사했으나 떨어지지 않아 권총만 수습해 가지고 내려왔다는 보고와 함께 권총이 증거물로 제시되기도 했다.

결국, 이현상의 사살공로를 두고 군과 경찰이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고, 군경합동조사단이 파견되었다. 결과는 경찰의 손을 들어주었고 경찰 차일혁총경이 '태극무공훈장'을, 국군의 오동식상사가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한편, 당시 이현상의 은신처인 빗점골 아랫 마을인 의신부락에 살고 있는 정윤균은 이현상의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이현상부대는 53년에 빗점골에 거점을 두고 있었지요. 내가 속했던 화개면 유격대는 약초 캐는 사람으로 가장해서 빗점골 부근을 드나들며 정황을 살펴보았지만, 이현상의 거처는 도부지 알아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아마 9월15일?)인가, 오후에 남경사 소속 벼락부대(오동식상사의 유격대)가 권총 7자루(?)를 노획하고, 사살한 빨치산의 머리를 베어 포대에 담아가지고 내려오는 것을 의신마을에서 봤지요.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봤더니, 빗점골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이동중인 적을 발견하고 교전 끝에 전과를 올린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면서 적 중에는 다리에 총을 맞은 내의바람의 늙은이가 있었는데, 그 늙은이가 태연스럽게 '우리 얘기 좀 하자. 우선 목이 마르니 물을 좀 주고 짧은 총(권총) 찬 사람을 불러와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날은 어두어오고 해서 끌고 오기가 곤란할 것 같아 그냥 사살해 버리고 온다고 했어요. 목을 베려고 했으나 잘 잘라지지 않아 마침 옆에 미끈하게 생긴 인물이 있기에 그 쪽이 더 그럴싸해서 그놈 목만 잘라가지고 메고 오는 길이라고 했어요.

나는 벼락부대 사람들과 같이 신흥까지 내겨갔는데, 마침 전투경찰 2연대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어 마주쳤지요. 2연대는 이현상의 호위병을 잡아 앞세우고 이현상을 잡으러 나선 길이라고 했어요. 경찰대 사람들은 벼락부대 대원에게 술을 퍼먹여 매수한 다음, 사살자의 머리를 좀 보여달라고 했어요. 2연대의 생포자가 그 머리를 보더니, 이현상이 보좌관이라고 했어요. 결국 부상당한 늙은이가 이현상이란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 말은 듣고 2연대가 달려 올라가더니 다음날(9월18일?) 이현상의 시체를 찾아갖고 내려와서는 자기들이 이현상을 사살했다고 전과 보고를 올린 거지요. 이 때문에 군대와 경찰간에 공로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 이태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군과 경찰의 기록, 마을주민의 증언등을 종합해보면 결국 이현상의 시체를 두고, 이후 군경사이의 공로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군이 말하는 사살날자인 9월 15일과 경찰이 말하는 9월 18일 사이에 존재하는 3일의 시차는 시체를 수색하고 전공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착오인 셈이다.
처음으로


4. 이현상의 가족들의 삶.

앞서 살펴본 것 처럼 이현상은 전북 금산군 출신으로, 그의 직계 가족은 아내 최문기와
큰딸은 무영(茂永.23년생), 둘째는 외아들 극(剋.27년생) 둘째딸 문영(文永.34년생), 셋째딸이 상진(尙鎭.40년생)이있다. 한때 이현상의 딸이 남한에 살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듯 보인다. 이현상의 가족들은 북한으로 가 그곳에 정착한 것이 북한에서 발간되는 원간지 [금수강산] 10월호에 실림으로서 세간의 소문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이현상묘 - 북한 혁명열사릉
[사진] 북한 혁명열사릉에 있는 이현상의 묘.

 이현상의 외아들 이극은 이현상이 죽기전인 1948년 북한으로 갔으며, 이때 김일성을 만났다. 1992년 10월 7일자, [로동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당시 이현상은 남한에서 공산당의 불법화로 박헌영과 함께 평양에 있었고, 가족은 모두 남한에 있었다. 이현상이 빨치산 투쟁을 위해 다시 남으로 내려오는 순간이었다. '이현상이 남쪽으로 내려가기 직전, 김일성은 이현상을 만났다. 김일 성은 이현상에게 "하고 싶은 말과 부탁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하라"고 했다. 이에 이현상은 흘러내리는 안경을 바로잡으며 생각에 잠기더니 띄엄띄엄 "저의 아들딸 4남매의 앞날을 오직 김일성에게 의탁합니다"고 부탁했다. 이에 김일성은 이현상의 손을 잡으며 "어서 아이들을 보내라, 아들도 보내고 유망한 청년들도 보내라"고 말했다. 이현상이 북한을 떠난 지 두 달 후인 48년 8월, 이현상의 아들 이극과 몇몇 청년들이 평양으로 왔다. 이현상이 먼저 아들만 북한에 보낸 것 이다. 그때 이극은 21살의 청년이었다. 김일성은 이현상의 아들을 만났다.

 김일성은 같이 온 청년들과 나이가 엇비슷해 누가 이현상의 아들인지 몰랐다. 김일성이 "누가 이현상 동지의 아들인가"고 물었다. 이극이 정중히 일어나 인사하자 김일성은 "동무가 이현상 동지의 아들 이라. 그래 이름이 무엇인가"고 물었다. 이현상 아들이 "이극"이라고 대답하자 김일성은 "항상 이긴다는 뜻이구먼, 이름이 좋다"고 말했다."

 이현상의 죽음이후, 이승만 정부는 이현상의 가족을 찾기위해 노력한 것 같다. 이현상의 남은 가족들은 경찰등의 수색을 피해 갖은 고생을 하다 1953년~54년 사이에 북한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현상의 아내 최문기와 세 딸, 그리고 셋째형(이현식)의 아내와 자녀 중 두 아들과 딸이 북한으로 갔으며, 이들이 어떻게 북한으로 갔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현상의 가족들은 북한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다. 물론 그것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각별한 지시에 의해서였다.

이현상의 부인 최문기는 72년 사망, 김일성의 지시로 이현상의 가묘가 만들어진 혁명열사릉에 합장됐다. 이현상의 형수는 92년 1백살로 김일성이 직접 보낸 생일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현상의 외아들 이극은 김일성의 직접 지시로 유학을 다녀와 김일성 종합대학 교원 등 여러곳에서 근무했다. 인민사서라는 명예칭호를 받았으며, 정년을 넘겼지만 현재 인민대학습당에서 국제도서교환처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큰딸 이무영은 중앙당 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인민군 정치부와 노동당 에서 일했다. 지난해 70살을 맞았는데, 김일성이 직접 잔치상을 보냈 다고 이 잡지는 밝히고 있다. 둘째딸 이문영은 혁명유자녀들이 다니는 만경대 혁명학원을 졸업하고 중앙의 한 기관에서 일하다가 김일성의 배려로 당중앙위원회에서 일했다. 막내딸인 이상진은 대학졸업 후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북한의 첫 여성 1등 서기관이 됐다. 이상진은 이 잡지에서 "남편은 대외부문사업 에서 일하고 있으며 자신은 현재 경공업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시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만수대 의사당(국회의사당)방문때, 소개를 맡았던 안내자가 이현상의 막내딸 이상진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남한에 남아있던 이현상의 어머니 김씨는 "우리 현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만 되뇌이면서 90살이 넘도록 아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도 75년 세상을 떠났다. 남한에는 이현상의 사촌 등 몇몇 일가친척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신분을 숨기거 나 이현상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 이상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 '94. 11 이현상과 그 후손들(원희복)' 정리.

 한편 그가 태어난 고향 금산군 외부리에서 이현상은 1953년 9월 지리산 빗점골에서 사살됐다는 기록에도 불구하고 아직 외부리에 살고 있다. 동네 어른들의 기억 속에는 물론이고, 면사무소 호적에서도 그는 산 사람이다. 전쟁이후 여러 집 살던 이씨네가 풍비박산 흩어져 나갔고 "이제까지 아무도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해당 면사무소의 설명이다. 이같은 사실은 그의 죽음을 둘러싼 수수께끼가 많은 만큼 어디에선가의 "생존설"까지 간혹 제기되게 한다.  그가 살아있다면 2000년 현재 95세가  됨에도 불구하고...

  군사정권 시절을 보내면서 그의 얘기는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부분이다. 그가 태어난 고향인 충남 금산군 외부리(우리말로 바깥 가마실)에서는 그러나 그를 큰 사람으로 칭송한다. 우익이 자리한 내부리와 좌익동네 외부리는 엎치락뒤치락하는 남과 북의 교전이 계속되면서 "톱질 당했다."는 표현만큼 상처가 많은 동네이다. 지서에 끌려가 맞았고, 죽움을 당했다. 한때는 과부와 외아들이 많은 동네라 했다. 또 빨갱이 동네, 모스크바로 불리며 "6.25 끝나고 숨도 못 셨다."는 것이 동네 토박이 양현오씨(68)의 증언이다.  그럼에도 "큰 사람이 나다보니 아랫사람 고생하는 것은 당연하지."하며 "그럴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에 원망은 없다."는 게 외부리 정서이다. 전쟁후 한동안 이씨의 어머니와 형수가 살고 있을 땐 군수가 바뀔 때마다 인사를 다녀갔다는 주민들은 얘기를 들어보면, 금산 일원에서 이현상은 이단아 이기 앞서 지역의 영웅이었던 듯하다. (중략)

 그러나 그에 대한 얘기는 유력한 증언자가 될 산중에서 측근들이 거의 죽었거나 찾아내기 어려워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토벌군 쪽의 기록도 가지각색이다. 이후 이씨의 가족은 아들 극(27년생)과 아내 최성녀 씨가 월북해 평양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을 뿐. 정작 본인은 남한 빨치산의 운명처럼, 주검조차 버림받은 비극적인 인물이 되었다.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 가운데 하나라는 후대 사람들의 평가만큼이나 지금은 그의 죽음을 정리하는 사람조차 없다. 누구도 앞서 말하기 꺼려하던 일련의 사건들.  50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6월이 되면  종결되지 않은 한반도 역사는 되살아난다. 정리되지 않은 그의 호적처럼......
                                   - 이상 2000년 5월 18일 '엄은화의 대전 문화찾기(중도일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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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간 이현상

 앞서 살펴본 것 처럼, 이현상의 생애와 투쟁, 죽음은 아직 완전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들을 살펴볼 때, 이현상은 투철한 항일 독립운동가, 공산주의 혁명가,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지도자임에 분명하다.

 먼저 그는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견디며 끝까지 투쟁한 독립운동가였다. 그와 함께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던 이승엽등이 한때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거나 협조하는 모습을 보인데 반해 그는 일제와의 싸움에서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곧은 의지를 보여주었다. 명확하게 드러나는 면은 아니지만, 그는 상당히 민족적 정서를 가진 공산주의자였으며, 그에게 있어 진정한 해방은 일제로부터의 조국독립과 계급해방이 함께 하는 것이었다.

 또, 그는 조선공산당, 후에는 남로당이라는 해방전후의 한국 공산주의 운동을 이끈 혁명가였다. 당시 공산당에는 남로당과 북로당, 해외파와 국내파등 수많은 계파간의 갈등이 존재했고, 이들 계파들은 수많은 희생을 치르며 변화해갔다. 이런 환경속에서 이현상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내며 지리산으로 찾아들었고 지리산에서 죽어갔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많은 이견들이 있지만, 그는 죽기전에 '제5지구당 위원장'직을 박탈당하고, 평당원으로 강등되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또 그는 이런 결정을 수용하였으며 조선공산당 내부의 갈등속에서 정해진 길을 걸어간 것이다.

 이현상에 대하여 이태가 남긴 '그는 분명 코뮤니스트였지만, 철저한 이론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라는 평가를 통해 그의 공산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추측해볼 수 있다. 또, 그가  죽을 때 가졌던 물품중 '염주'가 있었으며 어느정도 '불교'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빨치산 대장으로서 이현상은, 모든 대원들로부터 지극한 흠앙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부대를 지휘하고 전투를 치러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지휘관이었다. 그는 남부군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입산한 이래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전투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앞서서 부대를 지휘했다. 예리한 판단력과 전술을 갖춘 유격전 전문가였다.

 그 어떤 일 앞에서도 화를 내는 일이 없고, 그 어떤 문제를 놓고도 장황하게 말하는 법이 없고, 당 이론에 관한 것이면 안 읽은게 거의 없으면서도 토론을 즐기지 않았다는 분. 지쳐 쓰러진 대원의 짐을 손수 짊어지고, 대원들의 시체를 볼 때마다 땅 깊이 묻어주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 했고, 유일한 반찬으로 마련된 고추장 한 보시기를 굳이 가져오게 해 손수 나뭇가지를 꺾어 일일이 찍어 먹였다는 분. - 조정래 <태백산맥> 10권 중에서...

 또 그는 대원들에게 언제나 겸손하고 친절한 대장이었다고 한다. 수많은 유격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어떠한 어려움에서도 살아남아 민간에 무슨 신통력을 가진 영웅처럼 전해지기도 했지만, 실제 그는 과묵하고 진지한 표정을 잃지 않는 중년신사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현상은 엄혹한 시대를 살다간 '독립운동가'였으며 '혁명가'였고, 전쟁에 있어 용맹하고 사람들을 대하는데 있어 겸손한 '빨치산의 대장'이었다. 그런 그가 시대가 준 것은 끝없는 시련이었고, 결국은 비극적인 죽음뿐이었다. 그는 엄혹한 시대를 자신의 신념으로 끝까지 밀고간 영웅이었고 동료와 부하들의 아픔을 함께한 따듯한 영웅이었다. 험준한 능선에서 고독한 표정으로 서있는 이현상의 모습은 '지리산'속에 서있는 또하나의 '지리산'인 것이다.

        지리산의 풍운이
        당홍동에 감도는데
        검을 품고
        남주를 넘어오길 천리로다
        언제 내 마음속에서
        조국을 떠난 적이 있었을까.
        가슴에 단단한 각오가 있고
        마음엔 끓는 피가 있도다.   
                      ...이현상이 남긴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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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고자료.

  - 이태 <남부군> <비극의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 엄은화의 대전문화찾기(중도일보) http://my.dreamwiz.com/omana21
  - 뉴스메이커 94년 11월회 '이현상과 그 후손들' (원희복)
  - 대하르포 지리산 1994, 최화수 http://net-in.co.kr/dimout/
  - 기타 각종 지리산관련 홈페이지들.
  - 관련도서 : 조정래 장편소설 <태백산맥> 이병주 장편소설 <지리산>
                    권운상 장편소설 <녹슬은해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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