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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진 지리산 이야기/제밌지.지리야그.!

[스크랩] 지리산 사진작가 임소혁

 

요즘 부쩍 마음을 끌고 있는 것이 사진입니다. 특히 산 사진 ...

행동이 부자연스러웠던 최근 몇 주간 ...

임소혁님을 우연히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하늘에 수놓은 구름이야기 (대원사)

지리산 영혼이 머무는 곳에서 (다른 우리)

 

위 두권의 사진집을 접하는 순간 경탄과 경악 그 자체였습니다. 

지리산의 4계와 구름이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하는 경탄을 금치 못했으며,

무려 17년을 지리산에서 보낸 작가님의 집념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왕시루봉 외국인 산장 한채를 별장 삼아 10년 간은 아예 지리산에서 사시면서 ...

 

첫번째 책은 06년에 출판되어서 아직 재고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지리산과 우리의 다른 산에서 볼 수 있는 구름을 담고 있습니다.

사계와 기상의 변화, 일중의 변화에 따른 구름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

감히 접하기 어려운 장면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숨이 막힐 정도로 ...

10가지 구름의 모양을 공부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두번째 책은 02년에 출판된 것이라 그런지 구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겨우 한권을 구했습니다. 지리산의 사계를 담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임수혁님의 흔적을 찾아보았습니다.

검은별님이 전해주시는 소식을 보니까

임수혁님의 사진 갤러리가 최근 곡성에서 중산리로 옮겼다고 하네요.

중산리 산행을 마치고 진주가는 시외버스를 타게되는 중산리버스터미널 근처랍니다.

 

지리산 사진들로 달력을 만들어서 판매도 하시는 모양입니다.

가격은 5천원이고, 문의 전화는 055-973-5199, 011-726-3019입니다.

 

갑자기 지리산으로 가고 싶어집니다.

경방기간이기는 하지만 백무동~천왕봉~중산리 구간은 연중 개방이니 ...

 

임수혁님이 지리산을 찾는 방식대로

천왕봉에서 반야봉 일몰을 담아보고, 반야봉에서 천왕봉 일출을 담고 싶은데

후자는 어렵겠죠.

 

 

참, 대단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소름끼칠 정도의 집념이 없다면 저 만한 결과물을 나누어주기는 어려울 겁니다.

 

귀중한 작품 만으로도 고마움이 넘치시는 분이시지만

산행의 새로운 좌표를 설정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신 점도 감사드리게 됩니다.

 

감히 아무나 뒤따를 수 없는 행위이겠으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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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동안 오직 지리산만 찍었다

사진작가 임소혁
정상철 dreams@jeonlado.com

▲ "기다리면 어느 날 갑자기 산빛이 달라. 언제나 지리산은 쉽게 보여주지 않아."
ⓒ 임소혁


산이 거기 있기에 오른다. 산 사람들에게는 화두와 같은 이 말을 통해 무수한 사람들이 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몇몇은 아주 돌아오지 않았다.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할 수 없는 산 속으로 들어가 장엄하게 영혼이 스몄다. 에베레스트에서 얼음이 된 박무택처럼.


평생 동안 산에 오르고 발 딛을 때마다 건네는 질문에 산은 답을 주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거기 서 있을 뿐이다. 에베레스트나 K2, 설악산이나 지리산도 모두 똑같다. 화두를 채워 가는 것은 산에 오르는 사람의 발이다.

임소혁, 17년 동안 지리산만 찍어댄 사람. 그리하여 지리산 어디라도 자기 발자국 남기지 않은 데 없는 사람. 그에게 화두는 지리산이다. 산에서 돌아 나오면 곧바로 그리움이 밀려드는 곳, 그 산에 오르는 이유를 알기 위해 언제나 그는 찍는다. 가지고 올라 간 필름이 떨어지지 않는 한 절대 산밑으로 다시 걸음을 주지 않는다. 일테면 그에게 지리산은 그리고 사진은 박무택의 에베레스트와 같다.

 

 

‘매킨리’에 오르기 위해 사표를 쓰다


 

임소혁에게 사진은 부수적이다. 그는 사진을 찍기 위해 산에 올랐던 것이 아니라 산 사람으로 살며 산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이라는 방식으로 산을 담았다. 처음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도 집과 붙어 있던 북한산을 여러 날 오르고 난 후였다. 일상처럼 산에 발을 옮기다 보니 찍고 싶은 욕구가 생겼고 가정이 부유한 덕에 아버지의 카메라로 생각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성장한 이후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산악회 활동을 하며 전국의 산을 누볐고 그 과정에서 그가 오른 산들이 사진으로 담겨졌다. 사진을 돈과 바꾸는 행위는 상상하지 않았다. 그가 본격적으로 사진을 직업으로 삼은 것은 북미의 최고봉 알래스카 매킨리에 다녀 온 이후이다.

매킨리에서 특별한 영감을 얻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매킨리로 인해 잘 다니던 직장을 잃었다. 좀 더 부연하자면 지금까지도 이름깨나 날리고 있는 모대기업의 품질관리 직함을 스스로 버렸다. 그때가 1979년 6월이다.

회사는 그에게 매킨리에 다녀올 수 있는 한 달 여의 휴가를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는 가야 했다. 마음이 회사보다는 매킨리 쪽으로 훨씬 기울었기 때문이다. 집사람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그는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꼭 매킨리에 가고 싶은 마음이 사표로 이어진 건 아니야. 매킨리 이전에도 K2에 오를 기회가 있었는데 생활이 포기하게 만들었어. 그저 가고 싶은 산 마음대로 나다닐 수 없는 현실이 갑갑했던 거지.”

매킨리에서 돌아왔을 때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그는 이전보다 조금 자유스러워졌지만 경제는 기울었다.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고 산과도 여전히 가까울 요량으로 레저 회사를 차렸지만 오래지 않아 문을 닫았다. 그 암담함의 끝에 선택한 것이 직업으로서의 사진이다. 당시만 해도 사진을 팔아 원고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상당수 있었고, 달력에 그럴 듯한 자연풍광사진을 담는 것이 인기였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찍으면 돈으로 바꿀 수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지리산”

 

처음 파는 사진을 찍기 위해 영암 월출산에 들었다. 원래는 전국의 산들을 찾아다닐 생각이었다. 하지만 월출산의 가을을 담고 남은 필름을 소모하기 위해 그저 들렀던 지리산 반야봉에서 마음을 빼앗겼다. 이후 그는 카메라와 함께 있을 때 언제나 지리산에 있었다. 처음 지리산을 담는 순간 다른 곳을 찾아다녀야 하는 이유를 잃었고, 렌즈의 초점은 그 산에 고정됐다. 지리산을 찍어 만든 돈으로 다시 지리산을 찾았다. 17년 동안 그 일의 반복했을 뿐인데 지금은 알아주는 지리산 사진작가가 되었다.

왜 굳이 지리산이었을까. 그 산의 역사와 피맺힌 한만은 아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진실을 보여주는 곳”이 지리산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유는 그가 사진을 찍는 방식과도 일치한다.


그는 지금껏 봄꽃이 피는구나, 장마나 오는구나 혹은 단풍이 들었구나 이렇게 아래에서 먼저 느끼고 산에 오른 적이 없다. 누군가와 같이 산에 오르는 것도 싫어한다. 꽃이 피어나기 한참 전에 미리 올라가서 기다린다. 그 시간 동안 꽃들과 사는 얘기를 건네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줄 안다.


 

“기다리면 어느 날 갑자기 산빛이 달라. 꽃들은 소란스러워지고 능선에 서면 산이 아득하게 넓어지는 느낌이 들어. 그 맛이 몸으로 느껴지는 순간에 찍는 거지. 언제나 지리산은 쉽게 보여주지 않아.”

장마나 태풍이 불어올 때도 그의 방식은 변하지 않는다.
장마나 태풍이 오기 전 먼저 산에 들어가 비와 바람을 오로지 몸으로 견디고 버텨낸다. 때로 폭풍과 불어난 급류에 목숨을 걸어야 하지만 그는 이마저도 즐긴다. 한눈에 300리를 굽어볼 수 있다는 완전한 맑음의 순간이 장마와 태풍 뒤끝에 찾아들기 때문이다. 지리산을 담은 그의 사진들은 그렇게 모두 기다림과 몸의 견딤만으로 채워진 것들이다.

섬진강 줄기. 그의 사진 속에서는 아직 망가지지 않았다.
ⓒ 임소혁


지리산은 특히 그 어떤 산보다 빛에 민감하다. 사진을 하는 자에게는 숙명 같은 곳이다. 산줄기가 동에서 서로 뻗어 동이 틀 때는 반야봉에서 천황봉을 본다. 반대로 일몰 때는 천황봉에서 반야봉을 보고 찍어야 한다. 17년의 시간 동안 산의 특성을 몸으로 읽어내고 셔터를 눌렀기 때문에 그의 사진은 대부분 역광이다. 산 너울이 아득하게 흘러간다.


한 번 산에 들면 꼼짝없이 열흘에서 보름을 산 속에서 혼자 견딘다. 산장에도 가지 않는다. 누가 길을 물어도 꼭 한 번 가르쳐주고 돌아선다. 재차 질문이 오면 무시한다. 오로지 자신의 모든 힘을 산에 내어주기 위함이다. 산말고는 어디에도 소모되지 않는 힘으로 한 번 오를 때마다 많게는 80롤의 필름을 찍는다. 필름이 떨어지기 전에는 돌아올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혹여 필름이 남는다면 마지막에 세석평전에 들러 모두 찍는다. 지리산의 언덕은 언제나 그를 산 속에서 흘러 다니게 한다.

 

 

10년을 집 삼았던 왕시루봉 A-TENT

 

 

그는 언제나 대상을 곱씹으며 산다. 단지 생각만이 아니라 머릿속에 그리기 위해 낮에 찍은 것을 밤에는 글로 정리한다. 그 작업을 반복하면 언젠가는 대상이 사진으로 온다. 그에게 지리산의 모든 장소는 사진이며 글은 사진의 구도를 잡는 행위와 같다.

 

평생의 떨림을 그저 그리움만으로 남겨두기 싫었던가. 그는 90년대 초반부터 2002년까지 왕시루봉 A-TENT에서 꼬박 10년을 살았다. 기어코 산과 하나되는 길을 걸었다. 문만 열면 찍을 수 있고 걸어서 10분이면 왕시루봉 정상에 닿았다. 아예 산을 집 삼았고 매일 찍을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왕시루봉 생활은 행복했다. 2000년에는 그 결과물을 모아 지리산의 봄·여름·가을·겨울을 4회에 걸쳐 충무로에서 전시했다. 4권의 지리산 사진집과 하나의 CD롬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살면서 그때처럼 행복한 때가 또 올까. 산사람에게 문만 열면 산과 만나는 것처럼 좋은 건 없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상에 오르고 사진을 찍었지.”

지난해부터 그는 곡성에 산다. 폐교를 이용해 지리산사진 상설전시관 개념의 ‘섬진강문화학교’를 열었다. 지리산과 멀어져서 적적하지만 멀리서 그리워하는 맛도 그런 대로 괜찮다. 산을 내려온 까닭도 임소혁스럽다. 서서히 망가져 가는 보성강과 섬진강을 담고 싶어서, 아직 강줄기가 살아있을 때 사진으로나마 남겨놓기 위해서 그는 지리산 대신 섬진강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그렇게 산을 기록하는 일로 평생을 살았고 남은 시간도 그런 삶의 연장이기를 바란다. 자기가 어디를 가든 그곳이 머릿속에 살아 있기를 그리하여 언젠가 사진으로 살아나 주기를 바라는 사람, 찍을 대상과 함께 밤이 기울어 그의 어떤 하루는 맑다.

[프린트하기] 2005-07-25 15:17:11  
ⓒ 전라도닷컴  

 

 

 

지리산 통신/사진작가 임소혁/시문학 기념관
글·사진 황소영 기자


 ◇ 따뜻한 차를 마시며 임소혁씨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섬진강문화학교 내 찻집 ‘들국화 향기’. 임소혁(왼쪽에서 두 번째)씨가 갤러리를 찾아준 관람객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전북 남원과 전남 구례 사이에 낀 곡성군은 아슬아슬하게 지리산 권역에서 벗어나 있다. 남원역에 한 무리의 등산객을 풀어놓은 전라선 열차는 곡성과 압록역에 정차하지만, 칸칸이 대형배낭을 짊어진 산악인들은 두 역을 지나 구례구역에 내려설 뿐. 곡성은 그저 남원에서 구례로 가는 경유지 역할이 전부다.

 

엄밀히 따지면 곡성은 지리산군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 있지만, 작년 봄 섬진강과 보성강 물줄기가 맞닿은 두물머리, 그 산을 그대로 옮겨 놓은 이 덕분에 지리산자락이 되었다. 남원과 구례 틈에 외톨박이처럼 돌아앉은 곡성이 지리산 줄기임을 새삼 확인 받는 순간이었다.

지리산과 한몸 되기를 소망하다

지리산 사진작가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지명도를 가진 이가 임소혁(56세)씨다. 이미 안내서 <쉽게 찾는 우리 산·지리산>, 사진집 <산노을 산너울> <지리산, 영혼이 머무는 곳에서>를 출간했고, 산악잡지에 몇 차례 원고를 기고하며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해왔다.

 

10년을 꾹꾹 채워 지리산 왕시루봉에 머물렀던 그가 전남 곡성군 죽곡면 태안사 인근에 ‘섬진강문화학교’를 연 건 지난해 4월. 군으로부터 죽곡초등학교 동계분교(폐교)를 무상 임대 받았지만, 십수 년간 만난 지리산을 산 아래로 온전히 옮겨 놓는 작업이 결코 쉬울 리는 없었다.

 

1년간은 꼬박 교실 수리에 매달렸다. 사진 작업은 엄두도 못 낼 때였다. 폐교를 가꾸어 멋진 전시관을 만들고 동화처럼 살아보겠다는 건 환상일 뿐. 일일이 못질을 하고 대패질을 해서 그럴 듯한 외관을 갖췄지만 아직도 그이의 작업은 진행형이다. 폐교 보수 과정에서 손을 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니, 스스로에게 지독할 만큼 강하지 않다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지리산 세석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보니 해가 중천에 떴더라고요. 나 자신에게 얼마나 실망했는지…. 그후로 15년간은 절대 술을 대지 않았습니다. 사진작가에겐 자살행위나 다름없어요. 요즘이야 긴장이 풀린 탓인지 약간씩 마시긴 하지만요.”

 

멋쩍게 웃어 보이는 그이의 사진 철학은 흔들림이 없다. 자연의 색을 그대로 담기 위해 UV필터 외에는 사용하는 장비가 거의 없을 정도. 아침엔 무조건 일출 자리에 가 있어야 직성이 풀리고, 저녁 땐 해지는 언덕에 서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커피 한 잔 끓여 마시고 오는 한이 있더라도 그 시간 그 자리엔 꼭 있어야 한다. 자신과의 투철한 약속이다. “바람이 불어서, 친구가 와서, 날씨가 흐려서” 이런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결정적 한 컷을 위해 말하는 것조차도 아낀 그다. 그만큼 체력관리에 중점을 두었다는 말이다. 지리산에 묻혀 지리산과 한몸이 되기를 소망했던 임소혁씨는 곡성에 자리 잡은 게 약간 불만인 모양이다. 근처 어느 산을 올라도 지리산은 손톱만큼 보이는 게 고작. 그저 내다만 보여도 좋겠다. 지리산이 보이면 더할 나위 없겠다. 그렇다고 지리산에만 연연해가며 살고 싶진 않다. 앞으로는 사람들, 특히 2~3대 같이 모여 사는 산골 주민들의 진솔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다. 지리산을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겨두는 것도 좋겠다고 위로하는 그다.
 

섬진강문화학교 내 ‘임소혁 지리산 사진 갤러리’는 네 개의 테마로 구성돼 있다. 상층운·깃털구름·권운·양털구름 등 역동적이고 다양한 지리산의 구름을 담은 ‘구름의 세계’, 섬진강 수려한 물줄기를 그대로 옮긴 ‘섬진강 이야기’, 안개 속 물봉선화·노고단 원추리·세석 철쭉 등 야생화와 실비단폭포의 연초록 이끼 및 원시림을 찍은 ‘지리산의 야생화와 숲’ 그리고 ‘지리산의 사계’.

사진을 모두 합치면 500여 점에 달한다니 모든 전시관을 찬찬히 돌아보려면 하루를 꼬박 쏟아 부어도 모자랄 지경이다. 복도에는 왕시루봉 숙소(일명 A텐트) 전경과 각종 소품들이 전시돼 있다. 손때 묻은 등산장비, 낡은 카메라 도구들, 매킨리에서 사용했던 산악스키와 텐트에서부터 온몸이 찌그러진 수통, 방향감각을 잃은 나침반, 온기를 잃은 석유스토브까지. “2층은 아직 공사 중인데 곧 ‘흑백사진관’으로 문을 열 겁니다. 주위 사진작가들만 좋다면 그들에게 전시공간으로 대여도 할 것입니다.”

 

섬진강문화학교에서는 일찍이 두 차례의 라이브 공연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디지털 사진교실’을 열었다. 강당을 개조한 강의실은 워크숍 장소로 사용한다. 올해는 학교 앞마당을 야생화 밭으로 만들 예정인데, 이것저것 옮겨 심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솟은 꽃들을 그대로 지켜볼 생각이다. 주민들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제초제나 농약은 사용해보지 않았단다. 왕시루봉에서도 등산로 주위에 핀 얼레지 꽃을 밟지 않으려고 여간 고생한 게 아니었다. 그밖에도 별자리·사진·여행교실을 꾸준히 운영할 계획이다.

 

 

지리산에 살며 지리산만 찍는 임소혁 선생님

 

지리산을 찍고, 지리산에 살며 지리산을 탐구하는 임소혁 선생님은 북미 최고봉 알래스카 매킨리 산을 원정했으며(1979년 5월), 사진집 <일출:계명대출판부>을 출판했고(1989년), 한국의 지리산(한빛미디어)을 시디롬타이틀로 냈으며(1995년), 2년간(1995년 1월-1996년 12월) 월간 <산>지에 <지리산>을 연재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한국 고령산악회, 한국 환경 사진가회 회원으로, 지리산 왕시루봉에서 다람쥐 쮸쮸와 살면서 십년째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고, 10년이면 강사도 변한다는 게 세월의 흐름이자, 자연의 섭리다. 하물며 사람이 10년 간을 한 산에 미쳐 한 산만을 사진으로 담았다면 예사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0년 째 지리산만을 찍어온 사진작가 임소혁씨. 68년 고령산악회에 입회하면서 산을 배웠고, 사진을 찍으며 글을 배웠다. 본래 구속받기를 싫어하는 자유인이기를 소망한 그는 한국 남성이라면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가장의 역할을 아내 이정숙씨(47세)에게 맡긴 채 87년 지리산 산자락으로 들어갔다. 왕시루봉 외국인 별장을 한 채 빌려 1년에 절반 이상은 그곳에서 산다. 지리산에 입산한 지 10년인 그는 이제 지리산에 대해 어느 정도는 박사가 되었다.

 

'언제 어디가면 무슨 꽃이 피고 어디가면 무엇을 볼 수 있다'는 식으로 지리산의 사계를 꿰뚫어 본다. 그 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곳은 반야봉과 세석, 왕시루봉이다. 촛대봉에서 바라본 세석평전은 백두산과 개마고원의 축소판 같기만하여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한다. 그러나 세석은 등산객들의 발길에 아름답기만 하던 원추리 군락이 다 스러지고 볼장 다 본 곳이 되어버려 가슴이 아프다고 한다. 자비로운 미소 같기도 하고, 거대한 그러나 텅 빈 것 같기만한 반야봉은 지리산의 얼굴로 손색 없고, 왕시루봉에서 바라보는 천왕봉의 일출과 저물녘 햇살에 비낀 섬진강은 가슴 뭉클함을 준다고 한다.

그는 사진을 찍기 전에 글을 쓴다. 어떤 사진을 찍을 것인지 미리 정하고 그 느낌대로 사진을 찍고 싶은 욕심에서다. 단순한 기상변화에만 얽매여 찍는 것이 아닌, 찍고 싶은 사진의 분위기와 사물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그것과 마음이 통했을 때 사진으로 담는다. 끝임없이 꽃과 대화를 하고 제대로 물이 오를 때가지 기다려 절정의 순간에만 셔터를 누른다. "내가 느꼈던 감정들, 일테면 산새의 소리나, 상큼한 풀내음 같은 것을 내 사진을 보았을 때 감상하는 사람들도 느낄 수 있게끔 감정이 담긴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사진을 한 이래로 집에 돈 한 푼 갔다 줘 본 적이 없다는 그. 봄이면 배낭가득 산나물을 뜯어 가거나 구례장날 쌀튀밥 한보따리로 가장으로서의 체면치레를 한다. 10년을 하루같이 지리산만 찍어 온 사람에게 소원이 있다면 당연히 그것은 지리산의 아름다움을 담은 사진집을 내는 일일 것이다. 그는 지금 덩치큰 지리산 전체가 아닌 소담하게 '반야봉'이나 '섬진강'을 담은 사진집을 내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 왕시루봉에서 길 잃은 다람쥐와 이름모를 풀들의 아빠 노릇도 하고 있는 임소혁씨. 그는 오늘도 지리산 어느 산자락에 텐트 한동 쳐놓고 몇일이고 변화무쌍한 날씨와 밀도(密度)있는 교감을 나누며 지리산의 산내음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최 병욱의 지리산 이야기   http://my.dreamwiz.com/choip7

 

 

 

[書評]임소혁 시·사진집 <지리산>

지리산의 사계, 노을과 너울에 대하여

                                                                         이  향  지

빛이 있을 동안은 사진을 찍고, 어둠이 내리면 시를 쓴다. 산사진작가 임소혁. 그는 지리산의 노을과 너울에 매료된 사람이다. 그는 월간<山>에 '지리산의 사계(1995.6∼1996.12)'를 연재한 바 있는데, 이 책에 담긴 사진과 시는 대부분 그 때의 것들이다. 가다듬고 가다듬어 한 권으로 묶어낸 '지리산(타임스페이스 간, 3만5천원)'을 보니, 묵직하면서도 아름답다. 이 작가가 지리산 하나에 기울인 사랑과 열정, 한결같이 추구해온 세계가 더욱 잘 보인다.

그의 '지리산' 사진들은 스케일이 크면서도 섬세하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껴안고 견디며 '머무는 사람'으로써의 지리산을 보여준다. 그의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화롯가의 정담처럼 훈훈하고 묵은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눈뜨고 말을 걸어오는 걸 느낀다. 현실과 환상을 결합하여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내는 그의 솜씨는 보는 이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산으로 가서 대자연 속에 머무를 수 있는 인생이라면 / 산으로 가는 이들에겐 그것은 곧 축복입니다("서시"에서)'고 말하는 그. 그는 스스로 축복 받은 사람이다. 작가 자신이 꿈꾸던 축복의 땅에 '붙박이 텐트("작가 임소혁의 왕시루봉산장"참고)'를 세우고 그 산의 일부로 살아본 사람이 아니면 만날 수 없었을 순간들을 포착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의 구도는 다양하면서도 이미지가 선명하다. 그의 구도는 단호하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먼 것과 가까운 것, 흐르는 것과 흐르지 않는 것을 하나의 앵글에 담아, 보는 이의 기억을 되살리고, 작가 자신이 꾸는 꿈을 같이 꾸게 만든다. 이 정도의 경지를 보여주려면 기계의 성능이나 솜씨만으로는 안 된다. 그는 한 컷 한 컷마다 삶의 호흡을 멈추고 자신의 혼을 불어넣었다. 단단한 것들과 부드러운 것, 변하는 것들과 변하지 않는 것들이 어울려 빚어내는 충만하고도 드높은 세계를 보여주고자 하는 지고지순한 열망이 그것을 가능케 했으리라.

'나는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저 산을 넘었고, / 흰 구름 흘러가는 곳 바라보며 마음껏 정처 없음을 / 노래할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서시"에서)'


산등성이에서의 그는 구름이며 노을이다. 긴 밤을 지리산과 함께 보낸 뒤의 그는 나무와 나무 사이, 이슬을 털며 일어서는 아침햇살이며, 혼돈을 찢고 솟아오르는 태초의 태양이기도 하다. 골짜기에서의 그는 지리산의 아픔을 녹이고 씻어 내리는 맑고도 시린 물이며, 말발도리꽃잎 위에 저 높은 곳 구름의 말을 전하는 부슬비방울이다.

그의 관조는 끈질기면서도 은근하다. 그의 시계(視界)는 겹겹한 산릉의 파도를 넘어, 안개와 구름의 수평선 저쪽에서 숨은 빛을 발견하고 되살릴 만큼 멀고도 깊은 곳까지 닿아있다. 그의 사진들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색깔과 선이 분명하다. 그의 가슴은 질기고도 부드러운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의 앵글에 사로잡힌 지리산의 사물과 풍경들은 '순간에서 영원으로'가는 행운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영원 속에 자유롭게 풀어둔다. 잠깐의 만남으로 오래 행복할 수 있는 길. 이 작가가 수많은 장르 중 사진을 택한 것은 아마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나의 산행은 그리움입니다. // 차마 견딜 수 없을 때면 장터목 너머 산 끝까지 오르고 / 임을 찾아 나서듯이 벽소령을 지납니다. / 숨가쁜 언덕에 올라서서 너른 고원에 안길 때면 / 산과 마주서는 기쁨을 물 한 모금으로 달래어보고, 바위 등걸에 누워 / 드높은 하늘을 바라봅니다. … // 나의 산행은 꿈이 남아 있습니다. // … / 이날 이때까지 가슴에서 쟁강이는 산 노을 산 너울 / 여전히 나의 꿈은, 오늘도 숨가쁜 산길에 들어서며 / 또박또박 휘날리는 산엣 그리움 밝혀갑니다. ("산 노을 산 너울"에서)'

그는 사진으로 다하지 못한 말을 시로 쓴다. 그의 시편들은 사랑의 회복과 영혼의 정화를 꿈꾸는 서정시들이다. 그의 시어들은 결이 곱고 나직하다. 그는 혼자 걸으나 어울려 사는 삶을 그리워한다. 포근한 사랑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지나간 시간 속에 있다. 그의 현실은 안타까우나 그의 이상은 거대한 산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산 밖의 세상으로 전달하는 데 바쳐진다. 그의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더없이 자상하면서도 주는 사랑이라는 데 있다. 사랑할 뿐, 상대의 사랑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임은 기억의 도처에 있으나, 그 임마저 소유하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둔다는 데 있다. 그의 무욕은 어느새 지리산을 닮아 있지 않은가.

'움트는 미루나무에서 / 재잘대는 참새떼가 속살스러워 / 옛이야기 가지런히 풀려가듯 / 실눈뜨는 봄내음.' 등으로 묘사되는 "산촌의 봄"에서부터 출발하는 그의 지리산행. 그의 지리산행은 '성엣장 풀려가는 섬진강'에서 눈속의 '일출'에 이르는 길이다.
*2000. 4월호. 월간 산, 수록.

지리산 原詩人, 임소혁


계절이 지나가는 세석평전엔 어김없이 한 사내가 바람이 되어 불어왔다가 불고간다. 사진가 임소혁. 그는 계절이 지나가는 소리, 꽃들이 피어나는 조심스러움, 곧 장마가 시작될 것 같은 하늘의 움직임, 내일이면 소리없이 피어날 안개의 눈치,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운해의 모양까지 생각하는 것들을 반드시 포착해내고야 마는 신비한 마력을 가진 사람이다. 무엇이 이토록 그를 단련시켰을까? 꽉 다문 입술, 쉽게 타협하지 않을 것 같은 미간의 힘찬 주름, 하나로 칭칭 묶은 머릿결까지, 단번에 내공의 소유자임을 확인한다. 그런 느낌이 들기가 무섭게 쉬 말문을 열지 않을 것 같은 그가, 일반인이 흔히 쓰지 않는 자기만의 맛깔스런 언어를 구사해내 한 번 더 놀라게 한다. 그러더니 털털 웃으며 오전 내내 뜰에 맨드라미 꽃씨를 심었단다.

 

글/박이찬


風景, 바람이 만들어낸 사진

 

인생이력이 화려하다. 대기업 직장생활에서부터 산악인, 그리고 산사진 전문가라는 수식어까지 다양하다. 어떻게 사진을 하게 되었나?

 

북한산 아래, 세검정이 고향이다. 아버지를 따라서 동네 뒷산 오르듯 자연스럽게 북한산을 등반하기 시작한 게 고질병의 계기다. 그러다가 대학시절에 카메라를 처음 손에 쥐었다. 보이는 게 산이니 담아낸 것도 산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에 대해서, 특히 산에 대한 청년의 고민 옆에는 다행히 카메라가 있었다. 흑백사진 현상하는 법만 속성학원에서 삼개월 배운 게 고작일 뿐이다. 잠시 레저사업을 하다가 걷잡을 수 없는 자본의 꼬임에 그만 접기도 했다. 사진이랑 등산은 취미로 할 뿐이었는데 막상 할 일 없어 막막해 할 때 산사진으로 이미 대가였던 안승일이라는 선배를 만났다. 당시 충무로에서 스튜디오를 하고 있었던 안선배가 ‘사진하면 돈 된다’고 하더라. 그러더니 여러 사진을 보여주면서 소위 잘 팔리는 작품에 대해 설명했다. ‘이것도 돈이 돼? 이것도?’, ‘너는 산을 잘 아니까 산 사진을 찍어봐라.’

 

80년대 초반. 잡지나 여러 매체에서 이미지 컷이 턱없이 부족해 무조건 다양하게 찍기만 하면 돈이 됐던 시기였다. 이미 사업을 엎고 궁여지책으로 시작했던 거라 이를 악물고 덤벼들었다. 다이어리나 카렌다에 쓰일 원고사진을 찍어 근근이 한해살이를 했다. 필름이 떨어져 작업을 못하는 달은 ‘썩은 달, 무채색의 계절’이라고 부르며 작정하고 쉬면서 여러 스튜디오를 기웃거리며 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필름을 얻기도 했다. 한 3~4년 정도 그렇게 고생하다 보니 점점 라이브러리에 스톡이 되고 혼자 작업하며 살아가기는 되더라.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본전인생인 것이다.

 

지리산은 그 어떤 산보다 장엄한 깊이와 넓이를 가진 산이다. 그래서일까. 지리산에 집착하는 산악인들이 유독 많은 것 같다. 지리산을 17년간 촬영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왜 지리산인가?

 

산마다 저마다의 모양이 다르다. 설악은 사진찍기에 아주 멋진 풍채를 가지고 있어 파인더 속으로 들어오는 광경은 모조리 아름다운 한 폭의 산수화가 된다. 바위들이 많기 때문에 볼 때마다 새롭고 신선하다. 그런데 이 놈의 지리산은 무조건 기다려야 된다. 삼남지방의 3개 도(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와 1개 시(남원), 4개 군(산청군, 하동군, 구례군, 함양군)에 걸쳐 경계가 없는 산자락을 펼치고 있는 지리산은 너무 광대해 촬영하기 힘들다. 이 산은 거의 역광 이외는 사진을 찍어낼 재간이 없다. 아니면 비가 오든지, 운해가 차든지, 태양이 뜨겁게 달구어서 올라오든지. 극한 자연현상에서만 사진작업이 된다. 설악산은 순광에서도 작업이 되지만 지리산은 역광 아니면 존재하질 않는다. 그래서 더욱 ‘거지’ 같다. 한번 올라가면 한 열흘은 내가 원하는 상황을 만나기 위해 꼼짝없이 기다려야만 한다.

 

그렇게 찍다보니까 히말라야나 알프스, 설악과는 느낌이 다른 게 분명히 지리산에 있었다. 바로 지리산만의 컬러이다. 보랏빛 노을, 이슬빛(약간 푸른색을 작가는 이슬빛이라 한다), 일출 등 나름의 풍경 속에 독특한 색을 추구해가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이 색깔을 찍는다. 보랏빛 노을은 사진으로 보면 쉬운데 찍기는 힘들다. 해가 떠오를 때 떠오르는 힘에 의해서 반사된 빛이 바로 반대편에 생겨 보랏빛 산노을을 만드는데, 정작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면 거기에 혼을 빼앗겨 뒤에 있는 보랏빛 노을이 얼마나 예쁜지 보지 못한다. 이 톤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바로 우리만의 색깔일 터이다. 우리 빛은 우리의 이슬과 습기, 아침바람과 새벽노을이 곁들어져 어울린 것이다. 바로 지리산의 빛이고 우리의 빛인 것이다.

 

촬영을 위해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족과의 갈등은 없었는지?

 

왜 없었겠는가, 매킨리 등반으로 시작된 떠돌이 생활에 가족의 조용한 내조가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멀쩡히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떠나기 전날에야 선전포고하듯이 시작된 해외원정 산행부터 지금의 지리산 사진가가 되기까지. 어느 해는 반미치광이로 어느 때는 산 거지가 되어 돌아오게 되는 집이었다. 딸과 아내는 잘 버티어 주었다. 그도그럴 것이 어영부영 시간을 축내며 사는 게 아니라 사진을 찍겠다고 고생하는 내 모습에 두손을 들었겠지. 특히 딸은 나의 작업을 보고 뒤질세라 열심히 살았단다. 고마울 따름이다.

 

나 또한 임소혁이라는 이름에 지금까지 조금이라도 흠집을 낼만한 일을 안했다. 이름을 걸고 산다는 생각으로 참으로 모질게 해왔다. 특히 나 자신과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아왔기 때문에 프로생활은 늦게 시작했지만 라이브러리에 스톡 된 필름이 지금은 5,000여컷 정도가 되었다.



폐교를 이용한 이 공간이 무척 인상 깊다. 지리산을 촬영하기 때문에 지리산과 가까워야 할텐데 오히려 섬진강과 가깝다. ‘섬진강 문화학교’가 이곳에 있는 것과 연관이 있는가?

 

왕시리봉에서 촬영하며 내내 생각한 게 있다. 바로 상설갤러리가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97년인가, 전국 10개 도시 순회전을 갖겠다며 혼자서 방송사, 잡지사, 신문사를 뛰어다니며 초대전을 준비하면서 느낀 게 상설 전시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하동에서부터 폐교를 찾아나서기 시작했으나 하동은 조건이 맞질 않았고, 구례를 찾아보았으나 이 역시 관광지라 마땅한 곳이 없었다. 일년에 1,500만원 정도의 사용료를 주어야 했으니. 그 바람에 할 수 없이 곡성까지 오게 되었다. 결국은 지리산과 멀어지게 된 것이다.

 

폐교를 개조해 인근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사진교육에서부터 전시도 갖는 등 만 2년째 이곳에 있지만 다시 지리산 기슭으로 옮겨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치 건너 두치라고 지리산하고 떨어져 있어 아쉬운 점이 많다.

 

지리산에서 섬진강으로 촬영대상이 옮겨왔다.

 

섬진강은 지리산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곳이어서 촬영했다. 섬진강 자체가 지리산에 이미 포함된 것이다. 섬진강만 따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산은 사람 삶을 나누지만, 물은 다시 사람을 모은다. 왕시리봉 A텐트가 바로 섬진강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요지다. 여기(왕시리봉)에서부터 여수, 삼천포앞 바다까지 내다보고 한 컷의 사진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은 섬진강 곁에서 강 사람들의 이야기를 촬영하기도 했다.


이슬 빛 유희-사진과 놀다


가도가도 끝없는 산행 길에서 / 바람이고 싶던 날. / 때때로 모여서 밤비가 되고 싶던 날. / 날마다 때 이른 눈물로 하루를 삼고, 꼬박 지샌 것은 / 영혼의 빛 사르는 나의 산행입니다. -중략-

산길을 가다가 발길이 멈추는 곳, 세석평전 드넓은 벌판이 있고 / 바라보다 시선이 멈추어 선 반야봉에서 재잘거리던 산새들의 / 노래 씻기듯이, 해를 넘긴 산들바람이 불어 갑니다.

임소혁 시 ‘산 노을 산 너울’ 중에서

 

흔히 달력사진에 등장하는 멋진 풍경사진은 누구나 찍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아주 깊은 사진가의 인내를 요구한다. 오랜 기다림과 그 기다림 속에서 작가의 번뜩이는 심미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진작업과 글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두 작업의 연관을 설명한다면?

 

한 번 산에 들어오면 족히 보름은 있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렇게 세석평전을 6년을 찍었다. 반야봉에서 사진 찍다가 세석평전에 들러 몸을 풀고 간다. 남아 있는 필름을 가지고 사나흘은 놀다가야 되는 곳이다. 그러다가 꽃이 피면 일주일에서 열흘은 같이 놀아준다. 햇살이 평범하게 비치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좀 더 세밀하게 방향을 바꾼다든지, 아주 미묘한 변화가 있다. 노래도 부르고 돌도 던지며 꽃에게 ‘왜 안 피냐’고 말 걸어보기도 한다. 쉽게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다.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그렇게 동화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입산한지 닷새쯤 지나야 족제비와 노오란 단비가 철렁철렁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지나간다. 처음엔 사람냄새를 맡고 접근도 안하던 것들이다. 한 5일 동안 땅과 뒹굴다보면 사람냄새가 없어진다. 사람 때가 땅과 하나가 되는 순간. 그렇게 되어야만 그네들도 나를 반긴다. 세석평전에 서 있으면 내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알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 나약한 동물 중에 하나일 뿐이다.       

 

처음엔 사진을 그렸었다. 해도 꽃도 맘대로 그리다보니 슬슬 어느 순간에 그게 글이 되더라. 글을 쓰다보니까 다른 사람들은 쉽게 지나칠 것을 나는 자꾸 되씹어 보게 되었다. 머릿속의 풍경을 그림보다는 글로 옮기는 게 더 자연스러워졌고 급기야는 상상의 풍경이 파인더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느 숲에 가면 무슨 소리가 있고, 꽃은 어떠한 모습으로 들판에 피어야 되고, 이슬은 어떤 무게로 맺혀야 되고, 바람은 또 어떻게 저 언덕을 넘어가야 되고, 그 언덕에서 억새는 어떻게 나부껴야 되는지 등등. 그렇게 글로 가져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생각했던 바람이 실제로 그 언덕을 넘어가고 있더라. ‘계절이 지나가는 언덕’이라는 사진이 그렇게 나오게 된 것이다. 이렇게 느낌을 가지고 있으면 지루함도 사라진다. 자연과 더욱 친숙해지고 자연과 더욱 가까이 가려고 하는 바램 속에서만 사진이 만들어진다

 

지리산이 은인일 수도 있겠다.

 

해발 1500에서 1800, 1900미터 고지의 지리산 봉우리마다 내가 원하는 곳에는 물이 있다. 지금도 일반사람들은 산장까지 내려가 물을 떠오지만, 나는 곳곳에 아무도 모르는 나만 아는 샘물을 가지고 있다. 중봉에는 온종일 똑똑 떨어져서 세숫대야로 겨우 차는 물이 있는데, 하루는 하도 머리가 가려워서 그 물로 머리를 감은 적이 있다. 그게 어찌나 사치스럽게 느껴지던지. 지리산은 나 홀로 편하게 취해서 쓸 수 있는 물, 그 생명의 물을 주었기에 오랫동안 버티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이곳은 지리산과 거리가 먼 편이다. ‘지리산 아카데미 하우스’를 만들기 위해서도 지리산 근처로 빨리 옮겨야 한다는 욕심을 부리고 있다. 궁극적으론 지리산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음악, 문학, 미술 등 여러 장르의 예술활동을 아우를 수 있는 지리산의 모든 것이 담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은데 이곳에서는 사실상 어렵다고 본다. 다시 떠날 채비를 해야겠다.

 

작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교통도로지도가 그려놓은 친절한 길을 접고 일부로 먼 길을 돌아온다. 산이 높으면 물도 맑다. 지리산을 그림자로 한 채 남서로 감돌아 남해에 이르는 섬진강은 그 물이 맑고 푸르러 한 폭의 파란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고 양쪽에 펼쳐진 백사장도 하얀 명주천을 깐듯 아름답다. 화개를 지난 섬진강은 넓은 백사장을 형성하면서 여유를 부린다.  밝고 화사하게 쏟아지는 봄 햇살 속,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을 여러 산봉우리들과 악양 들판이 곱게 감싸고 있다.

 

산악인들은 말한다. ‘설악산은 끌리고(引), 오대산은 편하고(安), 지리산은 모르겠다(不知)라고.


편집자주)

*왕시리봉 : 정상부가 평퍼짐하고 두리뭉실하게 생겨 마치 큰 시루를 엎어놓은 것과 같다하여 왕시리봉(1,243m)이라 이름지어졌다. 발 아래 섬진강이 흐르고 백운산과 마주보고 있어 수려한 경관은 비길 데 없다. 봄엔 철쭉이, 가을엔 정상부 초원이 온통 억새밭으로 변한다.

*세석평전 : 봄이면 난만(爛漫)히 피어나는 철쭉으로 온통 꽃사태를 이루는 해발 1,600m의 세석평전은 30리가 넘는 드넓은 평원으로 남녘 최대의 고원이다. 이름 그대로 잔돌이 많고 시원한 샘물도 콸콸 쏟아지는 세석평전에는 수 십만 그루의 철쭉이 5월초부터 6월말까지 꽃망울을 터트리며 한바탕 흐드러진 잔치가 벌어진다.


임소혁(Im, So-hyeok)

1979 알라스카 메킨리산 등반

1989 ‘일출’ 사진집 발간

1995 한국의 지리산 CD롬 제작

1995.1~1996.12 월간 산 ‘지리산’ 연재

1997 쉽게 찾는 우리산 ‘지리산’(현암사 발간)

1997.10~1998.12 전국 10개도시 순회 ‘지리산’ 사진전

현)한국고령산악회회원, 한국환경사진가회원, 한국산악사진가회원

 

 

 

출처 : 歸去來辭
글쓴이 : 강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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