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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싶다

어린 단종의 한이 서린 청령포

 어린 단종의 한이 서린 청령포

  단양팔경중 제 1경이였던 도담삼봉, 그리고 장회나루에서 바라보는

  구담봉과 옥순봉을 뒤로하고 첫날오후에는 이제 영월로 이동을 합니다.

 

   영월의 유명한 먹거리라던 "다한우촌"에서 정신없는 식사를 마치고

   지난 겨울여행때 들러보지 못했던 어린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를 우선적으로

   찾아갑니다.

  

    한반도지형, 장릉, 선돌, 청령포, 등등 영월의 볼거리들은

    따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10분에서  30분 반경안에  다 들어와 있습니다.

 

   그 중 단한곳의 선택....서강과 육육봉이 가로막고 있는 청령포입니다.

 

 

영월 청령포는

어린 나이에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유배지로

서쪽은 육육봉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고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섬과 같이형성된 곳으로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 망향탑 등 슬픈 역사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곳입니다.

천연기념물인 ‘관음송’ 을 비롯하여 단종의 어가 주변에 조성된 크고 오래된 소나무들이

 270° 돌아 흐르는 서강과 어우러져 자연 경관이 뛰어난 명승지입니다.

또한 감입곡류하천과 하안단구에 대해서도 알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감입곡류하천이라 함은 구불구불한 하천인데 융기(영력)라는 작용에 의해서 형성된 지형을 말한다고 합니다.

 

           ▲ 청령포 : 앞에 흐르는 강은 서강이고 뒤에 보이는 산은 육육봉이라고 한답니다.

 

이곳 청령포로 들어가는 뱃길은 뱃머리 돌릴 시간마저 촉박할정도로 거리가 짧습니다.

잠깐만 수영을 하더라도 숨차기전에 넘어갈수 있을듯도 싶은 것이지요

키큰 어른일 경우 걸어 들어간데도 그 키를 넘지는 못할듯도 싶습니다.

뒤에 병풍처럼 보이는 조그마한 봉우리들은 육육봉이라네요

이 조그마한 산이 험준해서 앞에 보이는 서강과 함께 앞뒤를 막아서 섬같은 유배지가 되었다는데..ㅎㅎ

지금 보여지는 느낌들과 그 옛날의 지형과 상황들은 또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금도 애써 뱃머리 돌리기도 힘든 얕은 수심의 뱃길을 운영하는 이유인즉슨

섬같은 고립된 유배지의 단종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낄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라고 하네요

당연 단종이 유배올적의 서강은 지금의 모습은 아니였겠지요

훨씬 물살도 거칠고 그 폭도 넓었다고 합니다.

뒷쪽의 육육봉에는 거친 날짐승과 호랑이마저 살았다고 하니

감히 어린 단종이 산을 넘을 생각은 꿈에도 하질 못했겠지요..ㅎㅎ

 

 

 

 


 

 

어린 단종의 유배지였던 이곳 청령포는

유독 소나무 숲이 잘 가꾸어져 있습니다..

천연기념물인 관음송을 비롯하여 흐트러짐없이 쭉쭉 뻣은 소나무들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줍니다.  시원한 소나무 숲길을 역사의 아픔과 함께

거닐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 천연기념물인 ‘관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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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연기념물인 ‘관음송’

석가탄신일이 끼여있었던 이번 연휴때인지라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참 많은 날입니다.

평소에도 이처럼 많은 것인지는 모를 일입니다만

휴일임에도 문화관광해설사님의 지루하지 않는 청령포 관련 이야기가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세상에는 딱 지가 아는만큼 보인다는데..

아는 것이 없으면 듣기라도 잘해야 하겠지요..ㅎㅎ

지처럼 아는 것이 없는 얼치기들은

해설사님의 좋은 설명을 잘 들어보고 청령포를 다시 둘러보는 것도 역사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조에 의해 청령포로 귀양살이를 하게된 단종은

여기서 2개월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가

그 해에 있었던 큰 홍수로 인하여 읍내 관풍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6호)으로 어소를 옮겨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세조는 노산군과 금성대군을 사사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계속되는 주청에

결국 어린 조카인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다.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은 단종대왕은 1457년 10월 24일, 17세의 어린 나이로 관풍헌에서 그 짧고도 슬픈  생을 마감했다.

 

단종대왕의 시신은 강물에 아무렇게나 버려졌다. "단종의 시신에 손을 대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

세조의 명에도 불구하고 동강에 떠다니던 단종대왕의 시신을 수습하여 선산에 묻었던  

영월호장 엄홍도는 훗날 단종대왕이 복위된 후 충절의 상징으로 함께 부활했다.

 

단종대왕은 이렇게 가슴 아프게 그 생을 마쳤으나, 영월 백성들의 단종대왕을 사모하는 충절과 신의에 보답하듯 장릉은 지금까지

자애로운 모습으로 이 지역을 굽어보며 두고두고 영월백성들에게 임금의 어진 후광을 베풀고 있다.

 

참고로 단종의 무덤인  영월 장릉은

조선 6대 임금인 단종(1441~1457)의 무덤으로 강원도 영월에 있다.

단종은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3년만에 왕위를 넘겨주고,

복위운동에 휘말려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둔 뒤 동강에 버려졌다.

 

시신은 영월호장이던 엄흥도가 수습해 암장했다가 중종 11년(1516)에 이르러 묘를 찾아 봉분을 조성했다.

선조 13년(1580)에 이르러서야 상석과 표석, 정자각, 홍살문 등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후 숙종 24년(1698)에 신위를 종묘 영녕전에 봉안하고,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추봉된 정릉과 경릉의 예에 따라 난간석과 병풍석, 무인석은 생략되었다.

 

 

 

 

왼쪽의 쓰러질듯한 소나무는 단종이 기거했던 건물을 향해 묵도를 하는 모습이라는데

사진에서는 그럴싸한 표현이 이루어지질 못했습니다.

담 밖에서부터 담 안쪽으로 90도 각도로 절을 하는 모습이라는데,..

우연치고는 아주 특별한 현상이 아닐수 없습니다.

 

또한 오래묵은 아담한 기와지붕과 쭉쭉 뻗은 소나무와 푸른빛 하늘..!

 묵도하는 소나무 보다는 이 고풍스런 건물과 소나무가 주는 풍경이 더 멋스럽고 좋습니다.ㅎㅎ

 


 

 

 

망향탑(望鄕塔 )

 청령포 서쪽 절벽인 육육봉과 노산대 사이에 있는 돌탑으로

어린 단종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이곳에 올라 한양 땅을 그리며 쌓았다는 탑으로

당시 애절했던 단종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



 

 

 

 

 


 

 

금표비(禁標碑) 

 

 금표비는 단종께서 1457년 노산군(魯山君) 으로 강봉,

유배되어 계시던 이곳을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행동을

제한하기 위하여 영조 2년(1726년)에 세운 비석이다..

뒷면에 『 동서 삼백척 남북 사백구십척 차후 니생역재당금숭정구십구년( 東西 三百尺 南北 四百九十尺 此後 泥生亦在當禁崇禎九十九年) 』이라 음각되어 있는데 ,

이 뜻은 『 동서로 33尺 남북으로 490尺 ,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도 또한 금지하는데 해당된다.

숭정 99년』이라는 내용으로 ,

 당시 단종에게도 이와 같은 제약(制約) 이 있었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어린 단종의 한이 서렸다는 청령포를 온 식구들이 살방살방하게 둘러봅니다.

너무 어린 아이들은 그냥 철없는 즐거움으로...

그나마 조금이라도 나이먹은 아이들은 곤역같은 역사공부를 겸하는 역사탐방으로..ㅎㅎ

또 누군가는 취미라는 이름으로 사진적 그림만을 열심히 찾아내는 나름의 즐거움으로

 

분명 같은 곳을 다녀가고 같은 눈으로 들여다 볼지언정 느끼는 마음은 보는사람의 자유일테니...!

내가 보고 느낀것을 다른사람도 똑같이  느껴야 한다는 것은 분명 이기적인 욕심이리라...ㅎㅎ

 

시간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선돌이나 한반도지형 그리고 장릉이라도 둘러보면 좋을텐데...

강릉까지 달려야 할 시간이 촉박합니다.

 

이제 강릉 경포대, 사근진 , 고등어 가페를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