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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싶다

경기전 정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보관하고 있는 곳

          경기전정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보관하고 있는 곳

 

오목대에서 바라보는 전주한옥마을,

비내리는 날이라서 가을 색감이 더 선명한듯 합니다. 상술의 한옥마을 내부를 걷는 것 보다는

이곳 오목대에서 한눈으로 조망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그리고는 한옥마을과  구분이 안될성 싶은 경기전정전을 구경하러 갑니다.

어쩌면 한옥마을보다는 조선태조 이성계의 초상화가 보관되어 있다는 곳이

더 한옥마을 같은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곳입니다.

초상화 보관 건물만 들어가지 않을것이면 가을과 함께 알찬 한옥 건물들을 구경할수 있는 곳이 경기전정전입니다.

 

결국 경기전정전은 한옥마을의 다른 이름이고

한옥마을은 경기전을 보좌하는 주변 상가건물이 되어버린듯한 느낌입니다.

주객이 완벽하게 바뀌어버린..ㅎㅎ

그리고 한옥마을에서 경기전과 교동성당으로 이어지는 길은 조선식의 먹거리 종로거리...?

 

 

경기전정전(慶基殿 正殿)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태종 10년(1410)에 세웠다. 태조의 초상화를 보관하는 건물은

원래 개성, 영흥, 전주, 경주, 평양등 다섯 곳에

있었는데, 경기전정전을 제외한 나머지는

임진왜란(1592)때 모두 불에 타버렸다.

경기전정전도 정유재란(1597)때 불탔으나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세웠으며, 회랑을 두어

최고의 사당임을 나타내었다.

 

경기전 입구에는 말에서 내리는 속임을 표시한

하마비, 붉은 색칠을 한 홍살문, 내삼문, 이삼문

그리고 초상화를 모신 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홍살문(紅箭門)

         홍살문의 원음은 홍전문(紅箭門)이다.

         붉을 홍, 화살 전, 문 문. 한마디로 붉은 화살로 된 문이란 뜻이다. 여기서 붉은 색은 우리 세시풍속의 하나인 동지(冬至)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동지는 일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로서 동지를 지나면서 낮의 길이가 점점 질어진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동짓날에 제사를 올렸는데 그것은 태양신을 모시는 일종의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태양의 색깔은 음양(陰陽)에 있어 양(陽)의 색인 붉은 색으로 사악한 기운을 내쫓는 색이다. 그래서 동짓날 먹기도 하고

         대문이나 그 근처에 뿌리기도 하는 팥죽의 색도 붉은 색이다. 홍살문에 단청(丹靑)의 오방색(五方色) 중 붉은 색으로 칠을

         한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두 개의 기둥을 하고 그 사이로 붉은 살을 해 놓은 홍살문은 왕릉 능역이나 향교 등에서 악귀를 쫓는 풍수적 기능을 하는

         문임을 알 수 있다. 홍살은 능원이나 향교의 홍살문에만 설치한 것이 아니라 궁궐이나 관아의 대문, 사찰의 금강문과

         천왕문, 종각, 비각 그리고 정려각과 서원, 재실, 민가의 솟을대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구조를 보면 홍살 뿐만 아니라 가운데에는 삼지창(三枝槍)까지 만들어 놓았고 삼지창의 목 부분에 음양을 뜻하는

        태극(太極)이나 삼태극(三太極), 불교의 만(卍)자 그리고 단청문양을 그려넣기도 하였다.

        이 삼지창은 당파창(鏜鈀槍)이라고도 하는데 당파창은 전쟁을 치를 때 쓰는 군기(軍旗)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무당들이 이 삼지창을 사용하였는데 굿에 정성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쌀 위에 삼지창을 꽂아놓고

        그 위로 돼지머리를 걸어 이것이 쓰러지지 않아야 정성이 제대로 들어간 굿이었다 한다.


        결론적으로 홍살(화살)과 삼지창(창)은 쳐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을 막아내기 위한 풍수적 무기로서 그 의미가 있다 하겠다

 

 

 

 

 

 


◀ 태조 이성계의 어진(초상화) ▲ 어진이 보관중인 곳으로 가운데 통로는 신도라 하여 걸어다닐수 없는 곳이다.신과 동급인 왕과 신들만이 걸음할수 있는 곳이다.

▲ 가운데 검은통은드므로 화재에 대비해 방화수를 담는 물통이다.


 

 

 

경기전정전 내부는 이제 한참 가을이 내려 앉았네요

조선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나이를 묵은 고목에서 물들어 가는 가을..!

굳이 이씨 왕조의 초상화들에 관심없다손 치더라도 그윽한 고궁같은 단풍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멋스러운 여행입니다.

 

유독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던 오늘..!

형형색색의 사람들도 단풍의 한 색감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쉬엄 쉬엄..그 어떤 고궁이나 공원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 곳입니다.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

한자어 그대로 해와 달 앞의 다섯봉우리를 그린 그림으로 하늘에서 흰 달과 붉은 해가 좌우로 나뉘어 떠 있고,

그 아래로 다섯개의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그리고 산 아래로 격랑을 일으키며 출렁이는 파도가 나타나고, 화면의 좌우 양 쪽 끝으로는

붉은 몸통을 드러낸 무성한 소나무가 짝을 이루며 서있고 한쌍의 폭포가 양쪽으로 그려져 있다.

이 상징물들은 자연세계에서 선별된 것으로 이런 구성을 가진 작품을 조선시대에는 오봉도,

요즘에는 해와 달의 상징을 더하여 일월오봉도 또는 일월오악도라고도한다.

 

그림에서 보이는 해와 달은 음양을 상징하며, 다섯봉우리는 오행을 상징하며, 이런 음양오행들은 곧 우주를 의미하고 이런 우주의 생성과 변화

음양오행을 대변하는 상징물들을 주관하는 그림의 주인공인 국왕은

곧 우주의 주재자 또는 우주의 주재를 대신하는 존재와 같은 의미를 부여받을수 있었다.

 

일월오봉도에 완성은 병풍앞에 왕이 앉아 있어야 그 그림이 완성된다고 하여 일월오봉도 자체만으로는 미완성 병풍이라 할수 있는데

일월오봉도에는 왕이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하늘의 이치를 받들고 인의예지신을 갖추어 부지런하여 만백성의 아버지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담겨있고 또한 이렇게 좋은 정치를 펼치면 폭포처럼 생명의 기운이 온세상에 고루퍼져 풍요로울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월오봉도는 아무나 , 아무곳에서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예와 격식을 중시하던 조선시대  왕이 앉는 자리 뒤에 놓였으며

국왕이 야외에 행차하거나 국사를 진행할때에는 작은 일월오봉도 병풍이나 가리개를 설치하였다.

현재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의 어좌 뒤에서 모두 일월오봉도를 볼수 있으며 일월오봉도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볼 수 없으며

오직 조선에서만 기록되고 확인되어 조선 고유의 문화와 사상을 반영한 그림이라고 할수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모든 왕의 뒤에는 일월오봉도가 그려져 있으나, 조선 25대 임금인 철종의 초상화에는 일월오봉도가 그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안동김씨가 세도정치를 하던 당시 헌종이 승하하고 왕위를 계승할 세자가 없어 강화도에 있던 철종을 조선 25대 왕으로 앉히게 되는데

19세에 왕이 된 철종은 친정을 펼치면서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지만, 당시 세도정치의 절정을 이루었던 안동 김씨 세력의 견제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일월오봉도의 의미처럼 백성의 아버지 역할을 하지 못했고 좋은 정치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초상화에는 일월오봉도를 그려 넣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오봉도에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 태조 이성계의 어진 , 그리고 아랫쪽은 철종, 고종 ,순종

  ▶ 태조, 영조, 정조의 어진


 어진(왕의 초상화)제작방법

어진(御眞) 이란 왕의 초상화로 어용, 수용, 진용, 성진이라고도 한다.조선시대 어진제작은 도사, 추사 , 모사의 3종류로 나눠진다. 도사는 국왕 생존시에 그린 것이며, 추사는 왕이 돌아가신 후에 그리는 경우이다.모사는 기존의

어진을 본 떠 그리는 것을 말한다.

어진 제작과정은 먼저 담당할 도감을 설치하고 화원을 선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화원이 정해지면 밑그림을 그리고 배채기법으로 채색을 한다.

어진이 다 그려지면 장황을 하고 , 표제(누구의 어진)를 쓴 후 진전에

봉안 한다. 매 단계마다 왕과 대신들의 심사과정을 거치고 길일길시를

택하여 진행하였다.

털끝 하나라도 똑같지 않으면 초상화가 아니라고 했고, 초상화에겉 모습만이 아니라 내면의 정신세계까지 담아내야 한다고 하였다. 어진을 비롯해 한국

초상화 제작기법에서 독특한 것은 배채법으로 화면의 뒷면에서 안료를

칠하는 기법이다.이렇게 하면 뒷면에 칠해진 안료가 얇은 비단 화면을 통해 색채를 드러내는 만큼은은하고 깊은 색감을 준다.

 

현존하는 어진과 역대왕들의 어진제작

태조에서 철종대까지 25대 임금의 초상화중에서 현존하는 어진은 태조,

영조, 철종 어진뿐이다.세종과 정조 어진은 남아 있지 않아서, 기록으로

전해지는 모습과 그 후손들의 골격을 토대로 후대에 그린

표준영정(국가공인영정)이다.조선시대 왕들은 거의가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조선초에는 생전에 그리지 못한 경우 다음왕대에 그렸다.

태종은 생시에 어진이 제작되었지만, " 털끝 하나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 고 하여 자신의 어진을없애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들 세종은 차마 그럴수 없어서 보존해 두었다.

인조은 생전에 어진을 그리지 않았을 뿐더러 그리지 말라고 유언을 남겨

 결국 제작되지 못하였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쫓겨난 왕으로 어진제작

여부를 알 수 없다. 

숙종이후부터는 어진제작이 활발해져 여러 본을 동시에 제작하기도 하였다.

영조는 매 10년마다 어진을 그리려고 하였으며, 정조 역시 3번이나 다양한 복장으로 어진을 제작하였다. 순조의 세자였던 익종(추존 왕)은 22세에 사망했음에도 예진(세자의 초상화)을 8본이나 제작하였다.

그러나 현존하는 어진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렇게 된 것은 여러차례

전란으로 소실되었기 때문이다.한국전쟁 때도 부산으로 이안했다가,

1954년 창고에 불이나 상당수가 불에 타고 말았다.


 

 

 

 

 

         ▲ 경기전정전 내부에서 보이는 전동성당

 

 

  ◀ 경기전정전 내부건물들에서도 이런 곡식을 찧는 방아가 있습니다.

    왕이 먹는 우물도 있을것이면 친이 이런 곡식도 빻아서 진상을 해야 하지

    않았을까...?  한옥마을보다 더 한옥을 깊숙히 들여다 볼수 있는곳인듯 합니다


 

 

 


 ▲ 말에게 당근을 먹이는 트릭아트, 그리고 아랫쪽은 의복들을 입어볼수 있는

    체험장으로 약간의 대여료를 지불해야 한다.

    옷을 빌려입고 칼싸움 놀이를 하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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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동안의 비내린 오전시간이 지나면서부터는 제법 사람들이 많이 몰리기 시작합니다.

한옥마을 관광안내소에서부터 전동성당까지 이어지는 태조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왠만한 대도심의 최고 중심가의 한복판에 와있는듯한 착각이 들만큼..ㅎㅎ

한옥으로 만들어진 종로거리쯤...ㅎㅎ

온통 먹거리음식점과 잡동사니 상가들...!좀 색다른 한옥마을 거리였으면 싶었는데..좀 아쉬운 마음입니다.

 

이제 이 많은 사람들 따라서 전동성당으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