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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싶다

그 옛날의 조선과 현대가 공존하는 수원 화성

 

수원화성은 조선 후기 정조때에 세워진 계획도시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오른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곽으로, 

조선 시대 성곽 건축의 꽃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이곳을 잠깐 들렀다.

살벌하게 추웠던 을미년 신년 서울 나들이길(2015년 1월 1∼3일)

아들 녀석은 장염에 걸려서 미몽사몽, 딸아이도 더불어 잠에 취했고

옆지기와 둘이서 서둘러 둘러보았다.

창룡문에서 동암문까지는 자동차로

서장대에서 팔달문까지는 걸어서

그리고 화성행궁까지

 

수원화성, 그리고 정조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 사회는 서서히 변화의 물결을 타기 시작합니다.

농업기술의 발전과 생산력의 향상은 상업의 발달과 시장의 확대로 이어집니다.

이에 정조는 삼남의 교통중심지로서 상업, 경제활동이 활발하던 수원을

신도시로 키우고자 마음먹게 됩니다.

당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신하들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당시 18세기는 정치에서도 경제력이 필요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서울의 상인들은 이미 서인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정조는 서울의 상권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이 필요했고,

정조에게 수원은 왕권을 지탱해 줄 수 있는 배후도시로써 선택되었던 것입니다

수원화성과 실학, 정약용

수원화성의 형성에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새롭게 대두하기 시작한 실학이 큰 힘을 발휘하여

시대가 요구하는 경제유통이라는 실질적인 가치관에 주목해 

신도시를 건설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수원화성의 건립에 정조는 당시 홍문관에 근무하던 젊은 실학자에게 이 일을 맡깁니다.

그가 바로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입니다.   

그는 기존 조선 성제와 중국 성제, 서양 과학 기술의 장점을 연구하여

신도시 화성에 맞는 새로운 성곽을 고안해 냅니다.

상업도시라는 특징을 고려하여 성의 규모를 적절한 크기로 줄이고

성벽에 방어시설을 설치합니다.

또한, 유형거와 거중기라는 새로운 형태의 수레를 고안하여

이를 공사과정에 투입해 성곽의 축조에 큰 도움을 줍니다.

철저한 사전준비와 새로운 기술, 여유로운 자금 조달로

처음에 10년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되었던 공사를 2년 반 만에 끝내는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수원화성의 현재

수원화성은 도시 건설의 입안자인 동시에 최종 결정자였던 정조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여러가지 선진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세도정치 속 정치적인 위상은 약해졌지만 지리적 이점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던 수원화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침체를 겪게 됩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침체를 극복하고 경기도 제 1의 도시로 성장합니다.

또한 1974년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전면적인 보수가 이루어집니다.

그 후 1997년, 수원화성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서 보호받고 있습니다

 

 

 

 


서장대

장대란 성곾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하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있으며 화성장대 란 편액은 정조가 친히 쓴 것이다.

1794년(정조18년) 8월 11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29일 완성되었다.

 

정조는 1795년(정조19년) 윤2월12일 현륭원(융릉)참배를 마치고

서장대에 올라 성을 수비하고 공격하는 주간훈련과 야간훈련을

직접 지휘하였다.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습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습니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습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서남암문과 서남포사

암문은 성곾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이다.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으며

이문은 용도(담을 양쪽으로 쌓아 만든 길)의 출입문이기도 하다.

5개의 암문 중에서 유일하게 포사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796년(정조20년) 8월 6일 홍예가 완성되었다.

포사는 성 밖의 위험을 성 안으로 알리는 역할을 하는 시설이다.

깃발을 휘두르거나 대포를 쏘아 위급신호를 전달하였다.

 

 

 

 


남포루, 남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팔달문과 서남암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년 7월 9일 완공되었다. 포루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위한 화포를 쏠수 있도록 만든 시설로 치성의 발전된 형태이다.

팔달문 주위의 성벽과 화양루를 수비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팔달문


 

 

 

 

 

 

 

 

 

▲ 평범한 건물이 그림을 넣어서 아주 특이한 보물처럼 보인다.

화성행궁 입구

 

 

 

화성행궁 정조가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행궁은 임금이 임시로 머물던 장소를 뜻합니다.

정조 20년인 1796년에 건립된 곳이고, 현재 사적 제478호로 지정된 곳입니다.

정조는 이곳에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에 거동하거나

수원화성에 관련된 국사를 돌보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곳은 정조의 개혁정치가 빛을 발하던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문은 중국의 한나라가 나라를 시작한 풍패의 이름을 따서 신풍루(新豊樓)라 하였으며

행궁의 정당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축하하는 뜻으로

봉수당(奉壽堂)이라 이름 붙였다고 합니다. 

또한, 이곳에는 사적 제115호로 지정된 정조의 영전인 화령전(華寧殿)도 있습니다.

화령전에서는 정조가 서거한 뒤에 마치 사당처럼 정조의 초상을 모셔놓은 건물입니다 

화성행궁에는 다양한 체험거리가 있는데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바로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체험해볼 수 있는 뒤주체험장이었습니다!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억울한 역사의 장면을 재현할 수 있는 체험장이랍니다.

또한, 석가탄신일인 5월 17일까지 연등행사도 한다고 하니 화려한 연등도 좋은 볼거리가 될 것 같습니다

 

 

 

 

유여택(維與宅)

유여택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가 거처하는 곳으로 쓰이다가 임금이 행차하게 되면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곳으로

이용되던 건물이다., 1795년 행차때 정조는 이 건물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

원래 이 건물은 1790년에 건립하고 은약헌 이라 하였다가 1796년 증축하면서 유여택으로 이름을 바꿨다.

현재의 건물은 1998년 12월 복원된 것이다.

▲ 뒤주 체험장


▲ 유여택   ▼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부인이였던 혜경궁 홍씨

 

 

 

 


▲ 내시들의 숙소, 옷과 이불만 올릴수 있는 아주 좁은  방


 

 

 

 

 


◀  정조가 화성에 오기위해 한강을 건너는 모습, 수많은 배를

모아서 교각을 만들었으니 , 그 규모를 짐작케한다

 



 

 

 

 

 

 

 

 

 


정조의 초상화



 

 

 

운한각

운한각은 화령전의 정전으로 정조의 초상화를 봉인한 건물이다.

운한은 임금이 가뭄을 걱정하여 하늘에 기우제를 올릴때 불려 졌다는 [시경] 의 시 구에서 따왔다.

앞에는 제사 때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월대가 있고, 세 개의 계단이 놓여 있는데 가운데  계단은

혼백만이 사용하는 계단이다. 1801년에  만들어진 조선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다.

▲ 세개의 길중 가운데 길은 귀신(혼백)만이 다니는 길로 살아있는 사람은 걸을수 없는 길이다.

앞에 세군데의 계단중 가운데 계단도 마찬가지로 혼백만이 오를수 있는 계단이다.

▲ 정조의 초상을 옮길때 사용되었던 통로 , 영정은 정문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고 건물 뒷편으로 옮기게끔 되어있다.

 

 

 

 

 

봉수당

봉수당은 화성행국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정당)이었으며 정조가 수원행차시 머물렀던 곳이다.

평상시에는 수원유수부(한양을 방위하는 거점도시의 역할를 하였으며, 현대의 광역시 규모)의 동헌(동쪽의 건물)으로써

유수(현대의 도지사급)가 집무하선 곳이다.

현재의 건물은 1789년 9월25일 완공되었고, 1794년에 지금의 규모로 증축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파괴 되었다가 1997년에 복원되었다.

 

 

 

 


▲ 정조 앉았던 왕좌


▲ 아버지였던 사도세자의 제를 지내는 정조


 

 

 

 

창룡문

창룡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동쪽문으로 1795년(정조19년) 5월 8일 공사를 시작하여

10월 17일 마쳤다. 창룡은 곧 청룡으로 풍수지리상 좌청룡이며 동쪽을 의미한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반달모양으로 쌓았는데 장안문, 팔달문과 달리 한쪽을 열어 놓았다.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수원 화성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성곾안에 일반 시민들이 들어와서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문화재로써 관리보관만 하는게 아니라 생활속에서 그 옛날의 조선과 현대사회가 공존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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