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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마음은 태양/고향이라는이름

잊혀져 갈것 같은 ... 고향이라는 정겨운 이름...!

     잊혀져 갈것 같은 ... 고향이라는 정겨운 이름...!

     

요즘 아이들한테는 이제 고향이라는 단어는  알아먹지 못할 뜬구름같은 단어가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세상이 변하고  삶의 방식이 바뀌여가는 작금의 시대...!

     유교적인 제사의식도  대 혼란처럼 이어지는 명절날의 고향 찾아가기도...!

     지금의 세대가 지나고 나면..자연스럽게 다 잊혀질것 같은....ㅎㅎ

 

      그 어릴적의 유년이 온전히 살아있는 고향마을 풍경과 고향 앞 들녁이네요...!

     올봄..언제쯤인듯 싶은데 ....  사진첩 뒤지다가 인제서야   낸중을 위한

     기록으로 정리를 해 봅니다....지나면 이것들도 한장의 추억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ㅎㅎ

 

      ▲ 강진 군동면 화방사 조망터에서 보이는 고향마을 들녁..!

 

고향마을..!

아주 깊은 깡촌중에도  깡촌이였던 모양입니다.

하루에 대여섯번 다니는 버스를 타기위해서는 30분을 걸어 나가서야 그 읍내로 나가는 버스를

탈수 있었지요...!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ㅎㅎ)를 등교할려면은 그 고사리같은 걸음으로

한시간이 거뜬하게 걸렸구요...

물론 놀고 땡땡이 치고 걷는 걸음이 오죽하겠습니까마는...

 

참...!

이 마을에 전기라는 것이 들어올때가 국민학교에 다니고서도 한참 후의 일이니...!

어지간한 깡촌은 깡촌이였던 모양입니다.

 

초롱불에 초가집에 살아본적이 있으신가요...?

 

 

이 조그마한 화방사라는 절은 고향마을 뒷산쯤 되는 곳인데..

유년의 또래들이 이곳을 놀이터처럼 드나들던 곳입니다.

얼척없는 다람쥐를 잡아보겠다며...

지들 키보다 커버린 밥칡(칡 종류인데...그때는 그렇게 불렀음)을 캐 가겠다며...

수시로 드나들던 이곳..화방사

 

지금은 그 젊었던 스님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스산해진 절만큼 쇠잔해진 노승이 되셨다고 합니다.

절까지도 걸음하기가 힘이 드셔서 산밑에 조그마한 안식처를 마련하고

거기에서 기거를 하시는 모양입니다.

 

젊었을때의 그 스님...

참 대단한 방탕에 파란만장한 이야기들이 많았던듯 싶은데.....ㅎㅎ

 

 

 

 

 

 

 

▲  마을 앞에서 보이는 화방산. 그리고 중턱에 있을듯한 화방사.▲ 삼천만이 살펴보면 오는 간첩 설땅 없다.

 

지금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때는 이마을...50 여가구 정도 되었을 듯 한 이마을에

티비를 가지고 있는 집이 몇집 되질 않았었지요..

해서 티비가 있는집은 저녁마다 마을 영화관이 되곤 했었답니다.

그때...한참 열광했던 드라마들이라는것이..

나시찬 주연의 "전우". 또  항시 살벌했던 "옥녀"...그리고 "전설의 고향"...!

 한낮에 볼수 있었던 유년들의 즐거움은 " 마징가Z " 를 보는것이였지요.ㅎㅎ

 

전설의 고향을 보고서 한밤중에 집으로 가는 길은 왜 그리 무서웠던지...!

눈감고 죽어라 집까지 달려갔던..ㅎㅎㅎ

 

지금의 울 아들보다 더 나이를 먹었던 국민학교 6학년때...

그때...의지할곳 없는 거대도시인 광주로 떠났었군요,...늘상 그립기만 하던 고향이라는 곳을...

 

벌써 강산이 세번이나 바뀌어 버렸습니다.

 

지금은 명절때에만 아버님을 뵈러 산소에 가는것이 고향 갈수 있는길의 전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운 고향마을이면서도..쉽게 다녀가 지질 않는것은....?

 

화방사(花芳寺가)

  

강진읍에서 동북쪽으로 7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화방마을에는 마치 연꽃이 피어 있는 모양의    

화방산(花芳山, 252.6m)이 있고, 그 중턱에는 화방사(花芳寺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서쪽에 자리한 비파산(琵琶山, 399.5m) 기슭에는 신라시대 때 고운 최치원이 세웠다는 고운사가 있었다고 하나

이 절은 빈대가 극성을 부려 폐찰 된 뒤 지금의 화방사로 이건했고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화방사는 고려시대 1211년(희종 7년) 원묘국사가 백련사를 중창하면서

보은산 고성암과 함께 지은 화방암이 그 시초이다.

    화방암은 뒤에 화방사로 고쳤으며, <강진현지>에 기록된 나한사(羅漢寺)가 곧 지금의 화방사로 나한도량 이었다.

    또한 화방암은 1876년(고종 13년) 화주 경신스님이 새로 중창하고 다시 1888년에 화산 스님이 중수했다.

    그리고 1912년에는 태흥 스님이 삼존묘상과 16진용을 모셨는데,

당시 절의 모습이 지금과는 달리 자못 화려했다고 한다.

    최근 새로 지은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구조이며,

특기할만한 것으로 1917년에 세워진 천불산화암사 사적비가 있다.

이비는 대흥사 스님으로 초의선사 제자인 원응 계정(圓應戒定)스님이 지었는데

만덕산 백련사의 연혁과 함께 화방암의 기록이 남아 있어 강진 불교 역사 연구에 귀중한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 조계종 소속으로 대흥사의 말사인 화방사는 이 지역에서는 잘 알려진 사찰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화방산 중턱에는 마치 장군이 우뚝 서 있는 듯한 형상의 선바위(立岩)가 있다.

    옛날 어느 전쟁 중에 적군이 화방산 일대의 마을을 점령하기 위해 쳐들어 오다가

이 바위를 장군으로 잘못보고 군사들이 매복해 있는 것으로 착각한 나머지 혼비백산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서 화산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마을의 수호신이나 다름없는 이 바위의 공적을 높이 추앙하고 있다.

    또 화방산 자락에는 형제가 나란히 서 있는 듯한 형제바위와 누가보아도

광대의 얼굴을 닮은 광대바위가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오래 붙잡는다.

    옛날 인근 마을에 인색하기 짝이 없는 한 부자가 살았다.

    하루는 스님이 찾아와 시주를 부탁하였으나 냉대를 하자,

    기분이 상한 스님은 이 부자를 골탕 먹이기 위해 더 부자가 될 수 있는 묘안을 알려 주었다.

    그 묘안인 즉 "건너편 산에 있는 형제바위가 서로 많이 차지하려고 싸우고 있는 형상이므로

둘 중 하나를 없애버리라"는 것이었다.

    이에 부자는 석공들을 데리고 올라가 형제바위 사이에 구멍을 뚫어 서로를 떼어놓았는데,

이후 그 부자는 곧바로 망해버렸다.

    형제의 우애와 협력의 상징을 망쳐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바위의 영향인지 주변 마을에는 쌍둥이 출산이 잦다고 한다.

    광대바위는 형제바위 위에 있다.

    물론 스님이 그렇게까지 인정없이 한일은 아니라고 알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욕심을 경계하고 있어

듣는 이의들의 잔잔한  미소를 자아낸다

 

 

 

 

 

 

 

유년시절만큼한 아들을 데리고 찾아보는 고향이라는 곳

마을 곳곳 어디에서건...

그 유년의 아이들이 뛰어 나와서 구슬치기며 딱지치기를 하자며 달려들듯 합니다.

세월이라는것이 아무리 길게  지났더라도

결코 잊혀지지 않는것이 그  철부지 유년의 기억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시절 , 그때의 아이들은 어디서 ..

무슨 일들을 하며  살고 있는지...?

 

 

 

향수 - 이동원 / 박인수 - 이동원

노래 박인수 이동원
넓은벌 동쪽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음음음음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내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음~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지고 이삭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우우우
하늘에는 성근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잊~힐리야

가사 출처 : Daum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