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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싶다

어린 단종의 슬픔이 짖게 베여나는 영월 장릉

           영월 장릉... 어린 단종의 슬픈 역사를 찾아가는 길

           

            강원 여행에서 마지막으로 들러보는 곳입니다.

            어린 단종의 애잔한 설움이 베여나는 이곳

            또 수양대군의 권력에 대한 무자비한 욕심까지...

            그리고

            한시대를 술책으로 연명했던 세조의 책사 ...한명회까지도 떠오르게 하는 이곳

            그 서글프고 파란만장한 역사의 소용돌이 소리가 들릴듯한  역사의 숲길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단종의 삶과 역사

단종은 문종의 장남이며, 현덕 왕후 권씨 소생이다.

1441년 7월 23일 동궁의 자선당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홍위(弘暐)다.

8살 되던 1448년 왕세손에 봉책되었으며, 1450년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해 7월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1452년 5월 14일 문종이 죽자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명석했지만 너무 어려서 왕위에 오른 탓에 정사에 미숙했다.

미성년인 왕이 즉위하면 대비나 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관례지만 그에게는

어머니도 할머니도 없었다. 그런 까닭에 수양대군을 비롯한 왕숙들이 왕위를 노렸고

김종서, 황보인, 등 대신들은 왕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정사를 마음대로 하였다.

수양대군과 대신들 간의 힘겨루기 끝에, 급기야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살해하는 정변까지 일으켰다.

수양대군의 협박과 회유를 이기지 못한 단종은 1455년 6월 11일 세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가 1457년 6월 사육신 사건으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궁 밖으로 쫓겨났다.

그해 10월 24일 17세의 나이로 영월에서 죽었다.

 

 

 

청룡포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로, 2008년 12월 국가지정 명승50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 그 다음해인 1446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의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중추부사 노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다.

단종은 이 적막한 곳에서 외부와 두절된 유배생활을 했으며, 당시에는 이곳에 거처할 수 있는 집이 있어

호장 엄흥도는 남몰래 밤이면 이곳을찾아 문안을 드렸다고 전한다.
그 해 뜻밖의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니 단종은 영월 동헌의 객사로 처소를 옮겼다.
지금 청령포에는 단종 유배시에 세운 금표비(禁標碑)와 영조때 세운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가 서있어 옛일을 전하고 있다.

 또한 망향탑, 노산대, 관음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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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규시(子規詩)

 

원통한 새 한마리가 궁중을 나오니

외로운 몸 그림자마저 짝 잃고 푸른 산을 헤매누나

밤은 오는데 잠들 수가 없고

해가 바뀌어도 한은 끝없어라

새벽 산에 울음소리 끊어지고 달이 흰 빛을 잃어 가면

피 흐르는 봄 골짜기에 떨어진 꽃만 붉겠구나

하늘은  귀먹어 하소연을 듣지 못하는데

서러운 이 몸의 귀만 어찌 이리 밝아지는가

 

 

- 연려실기술- - 장릉지- 에 수록된 단종의 시

 

무엇이 열일곱 소년으로 하여금 그토록 절절한 시를 남기게 한 것일까

잠시 옛 기록을 따라 500여 년 전 영월로 돌아가 단종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늘 어린 손자를 등에 업고 궁정을 거닐며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아버지 세종과의 추억도 떠오르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세자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비명에 간 아버지 문종의 인자한 얼굴도

떠오른다.  자신을 낳은지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복위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사육신의 눈물도

생각난다. 무엇보다 청계천 영도교에서 생이별한 아내 정순왕후의

그리운 얼굴이 사무치게 보고 싶다.

그러나 단종은 살아서 영월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라고

이미 체념했을지도 모른다.

숙부 세조의 서슬퍼런 기운은 어린 그가 넘보기에는 너무나 높고 강한 것이였다.

 

죽음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사육신의 마음을 잊을수가 없다.

자신의 숙부에게 옥쇄를 내어줄 적에 애통함을 참지 못하고 연못에

뛰어들어 죽으려 했다는 박팽년의 마음,

그리고

세조의 달콤한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끝끝내 단종을 향한 충정을

보였줬던 성삼문의 마음,

두사람의 흐트러짐없는 절개를 표현한 시는

지금도 후세에 전하여 진다.

 

 

 

 

 먼저 박팽년이  " 까마귀 눈 비 맞아 " 에서

까마귀 눈 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하고  노래하니

 

성삼문이 이를 이어받아 "충의가(忠義歌)"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 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이 되어서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정하리라

 

하고 읊었다.

 

사육신이 끝내 지키려 했던 한 조각 붉은 마음, 바로 단종을 향한 마음이다.

 

하지만 그랬던 이들이 모두 자신의 복위를 꾀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세간에는 국왕을 지키지 못하고 먼저 간 사육신의 애통함만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국의 왕으로서 신하들을 보듬지 못한 단종의 비통함 또한 그에 못지 않았으리라.

더 이상은 자신으로 인해 피를 보고 싶지 않은 심정이야말로 단종이 마지막으로 품었던 단 한 가지 마음이 아니였을까...?

약관에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험한 바람에 꺽여버린 꽃망울처럼,  그렇게 단종은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나이 불과 열이곱이였다.

장릉(莊陵) 의 유래(由來)

 

조선왕조 제 6대 임금 단종대왕의 능이다.

세조 2년(1456)6월 집현전 학사 성삼문, 박팽년, 등이 상왕복위사건으로 참형을 당하였으며, 다음해 6월 21일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었고 그 다음날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2개월 남짓 기거하시던중

홍수로 인하여 관풍헌으로 옮기셨다.

세조3년(1457년) 여섯째 삼촌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계책이 발각되자 노산군은 폐서인(廢庶人)이 되었고

그해 10월 24일 사사(賜死)되었는데 그때 춘추 17세였다. 

단종의 유해가 동강에 흘렀는데 영월호장 엄홍도가 "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것은 달게 받겠다."는 충정으로

옥체를 수습하여 이곳에 밀장(密葬)하였다.

중종11년(1516) 노산묘를 찾으라는 왕명이 있었고 중종36+년(1541)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의 현몽에 따라 노산묘를 찾고

수축봉제(修築奉祭)하였다.

숙종11년(1698)에 추복(追復)하여 묘호를 단종으로 하고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단종이 승하하신지 241년 만에 왕실의 정례를 되찾게 되었다.

능상의 식물들은 추복릉의 전례에 따라 후릉(後陵)의 예를 본받아 행하라는 교지에 의하여

봉분주위에 석호(石虎)아 석양(石羊)이 각각 1쌍씩 있으며

봉분 앞에는 상석(床石)과 사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長明燈)이

있으며 능 양쪽에는 망주석(望株石) 2기와 문인석(文人石) 2기, 석마(石馬) 1쌍이 있고

무인석(武人石)은 없다.(실록의 근거)

 단종의 능인 장릉은

현재 강원도 영월읍에 있다.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강원도에 있는 능으로

다른 왕릉에 비해 규모는 작은 편이다. 그러나 단종에게 충성을 바친 264인의 위패를 모신

충신단, 이들의 넋을 배야하는 배식단, 몰래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암장한 엄홍도를 기리는

정려각 등 다른 왕릉보다  많은 건물을 볼 수 있다.

 

 ◀ 망주석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세호(細虎)가 없다.

 

영월 장릉은 처음부터 왕릉으로 택지된 곳에 조성한 능이 아니기 때문에

여느 조선 왕릉의 구조와 다른점이 많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는 일반적으로 일자형으로 조성되는데

반해 영월장릉은 "ㄱ" 자형으로 꺾여있다.


 

 

 

 소나무 숲길이 일품인 장릉 가는 길

 

 

 

 

 

 

 

 

 

 

 


 ▲  재실(齎室) : 능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 곳으로 왕릉을

                         관리하던 능참봉이 상주 하였다.


 

 

 

          박충원 낙촌비각 : ▶

             영월군수였던 낙촌 박충원이 노산묘를 찾은 일에

             대한 사연을 기록한 기적비각이다.

영월 장릉 경내 입구에 낙촌기적비각이 있으니 영월군수이던

낙촌 박충원이 노산묘를 찾은 일에 대한 사연을 기록한

기적비각이다.
이 비각은 1974년 5월 5일 그 후손들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1973년 성균관장 창산 성낙서가 쓴 비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단종이 폐위되어 영월로 유배되고 사육신의 참화가 일어나고

종친, 구신 등 삼족멸문의 화가 계속되니 세정은 극도로 음험할 때 단종마저 사사당하시니 엄흥도는 충성으로써 단종시신을

 업어다가 황량한 산골에 암장하였다.

어제의 군왕이 오늘과 같이 참변을 당하셨으니 어찌 천도가

무심하며 금지옥엽의 영혼인들 어찌 철천의 한이 없겠느냐.

엄호장 마저 세상을 떠나니 그 묘소조차 알길이 없어 풍설속에 버려지게 되었다. 이 후로는 이 고을 군수가 도임하면 원인

모르게 죽기를 3인에 이르렀다.
중종 36년에 박충원이 군수로 부임한 즉 군리(郡吏)가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박충원은 죽는 것은 명이라 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등촉을 밝히고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온 세사람에게 끌려가 본 즉 숲속에 어린 임금을

여섯신하가 둘러서 모시고 있었다.
임금을 꾸짖어 내다 처형할 것을 명하였으나 세 번째 있던 이가 살려두자고 임금께 아뢰어서 처형을 모면하였다.
깨어보니 꿈속의 일이 단종대왕의 일이라 짐작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단종묘소를 수소문함에 엄호장의 후손의 안내로 찾아가 보니 꿈 속에서 본 바와 같으므로 묘소를 수축하고 정중하게 제사를 올리니 그 후부터는 군수가 부임초에 죽어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단종역사관 : 단종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단종역사관.
잊혀지고 왜곡된 단종의 역사를 바로 잡고 이를 널리 알리고자 건립된 단종 역사관은

단종의 즉위식에서부터 사약을 받는 모습 등 단종의 일대기를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연대기식으로 모형전시되어 있다.

 

참고 자료

 - 영월군 장릉관리소 홍보 전단

 - 만화 조선왕조 실록 (박영규)

      - 영월관광 http://www.ywtou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