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허기진 지리산 이야기/제밌지.지리야그.!

박영발과 그 비트를 찾아서....

 

 

     빨치산 전남도당위원장이였던 박영발과 그 비트를 찾아서

     얼마전에 다녀왔던 반야봉 산행..!

      한없이 밀려있었던  숙제같은 이곳을 3번 도전만에 찾아갈수 있었다.

      그 반야비트라는 곳이 뭐 대단할것이야 있을까마는...

      그래도  우리 근현대사의  먼 옛적에는  박영발이라는 사람이 ,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공산 빨치산 활동을 하면서  실낱같은 목숨을  연명하며 숨어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지리산과 지리산 관련 역사 이야기에도 관심이 많은 돌팍이고 보면 박영발비트라고 하는 곳이 이곳 반야봉 근처의 

      폭포수골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니, 한번쯤은 역사의 흔적을 쫒아서 기어이 찾아보아야 직성이 풀리지 않겠는지..ㅎ

      기실 박영발이라는 사람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대단한 시대적  영웅도 아니다.

      그렇다고 한시대를 풍미했던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사람도  아니다.. 

      그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 시대의 고난한 삶을 살다간 우리시대의 아픈 역사적 인물일 뿐인것이다.

         

      참고로

      얼마지나지 않은  예전에는 감히 이런 공산 빨치산 관련 이야기를 도저히 입밖에 담을수 없었을 것을

      돌팍이 애써 꺼내보는 뜻은  박영발이라는 사람을 기억하고자 하는뜻도 아니고

      공산빨치산을 동경하자는 뜻은 더더욱 아님을  서두에서 밝힘니다.     

      생각이 쪼금 다르시다하여  오해하시거나 색안경 끼고 보시는 일은 없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진은 본인이 직접 찍은 것이고 , 글 내용 모두  인터넷상에서 무단 복사해 왔음을 또한 명확히 밝힘니다.     

 

     지리산 폭포수골 박영발 비트

 

지리산 반야봉(1732m)과 중봉(1732m)은 지리주능 어느 곳에서 쳐다보아도 봉긋하게 솟아 오른 모양이  마치 여인네의 엉덩이 처럼 보인다고 한다.지리산행에서의 영원한 이정표가 되는 곳으로 지리의 두번째 봉우리로 인정받고 있는 곳으로상봉이나 중봉에서 바라보이는 일몰이 더없이 아름다운 곳이다. 

 

이 봉우리는  불과 반세기 전의 동족상잔의 아픔을 가장많이 품고있는 봉우리이기도 하다.
반야봉 중허리는 거친골짝과 암벽을 동시에 품고 있어서  빨치산의 비트가 가장 많이 산재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 비트도 반야봉 아래 뱀사골지계곡에 어디에 있다는데  그 위치를 알고 있는 빨치산출신 장기수가 치매가 와서 찾지못하고 있다고 한다.
전남도당위원장이였던  박영발 비트는 반야봉 사면에 있다. 소년빨치산 출신인 김영승씨가 발견한 박영발비트는 발견당시 등사기 잉크통의 잉크도 마르지 않은체로 발견 되었었다고 한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서 일부 훼손도 되었지만 발견당시의 천연동굴안에는 통신선과 발전용 전지밧데리 등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전남도당위원장이였던 박영발은경북 봉화군 출신으로

1930년대에 봉화 지역을 중심으로 한 좌익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1940년대에는 만주에서 항일 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고문을 받아 1945년 경에는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고 한다.

적색노조 운동을 벌이면서 토목노동자로  일하던 중 1945년에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었다.
미군정 초기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서 토목노조위원장을 맡았고, 집행위원도 겸임했다.

1946년에는 남조선로동당을 창당하여 간부가 되었다.
1947년 경에 월북하였고, 박헌영의 추천으로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도 유학했으며,

1950년 한국전쟁시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남하했을때 결성된 조선로동당 전남도당 위원장에 올랐다.
그러나 전세가 역전되어 인민군이 후퇴하자 전남지역에 남아 김선우와 함께 유격전을 지휘 하게 된다.

 

 

 

박영발 사망1954년 1월중에는 전 전남도당위원장이며 5지구당 부위원장이던 박영발이 배암사골에서 최후를 마친다. 

그 무렵 전남도당 위원장은 부위원장이며 6.25 전 전남도책이던 김선우가 맡고 ,

박영발은 10호 결정서에 위해 배암사골에 설치한 " 조국출판사" 에 가 머물러 있었다.

그는 토벌대에게 포위되자 탈출을 단념하고 권총으로 자결해 버렸다.

경북봉화태생으로 학력이 전무한 대신 비상한 기억력을 갖고 있었던 토목노동자 출신의 박영발은

고집쟁이다운 장열한 최후를 마친것이다.

박영발은 어찌보면 편협하리만치 경직된 원칙주의자였다.,

다만 그와 비슷한 교조주의적 성향을 보이던 방준표의 귀족적이며

폭군적인 작풍과는 달리 군경포로를 살상하지 않고 돌려보내는 아량도 있었다.

지나치게 원칙을 고수하여 인사등용에 있어서도 반드시 "기본출신" 을 중용하고

고학력의 부농출신 대원을 감상적 자유주의자로 천시했다.

조직되고 의식화된 노동자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이런 그의 경직된 원칙주의는 많은 역 효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그의 측근에 있는 한 생존자는 "남부근위 능력본위의 인사가 부러웠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는 특히 숫자에대한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놀라울정도로 강인한 극기력과 의지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깡마르고 약간 큰 키에 몸이 몹시 허약해서 걷다가도 가끔 쓰러졌다가 숨을 가다듬고는 다시 일어나곤 했다고 한다.

정신력 하나로 버티는 그런 인상의 사나이였던 것이다. ( 이태의 남부군에서 발췌)

간이 사다리를 타고 동굴안 은신처로 올라가자

컴컴한 어둠이 50년을 묵은 듯한 퀴퀴한 냄새와 함께 온몸을 휘감는다.

초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은신처 안에 들어가자 하얗게 입김이 뿜어져 나왔으며

2평 가량의 좁은 공간에 허리를 펼 수 없는 낮은 천장이 위압감을 줬다.

은신처 벽은 차가운 물기로 흥건했으며 토벌대가 던진 수류탄에 맞아 여기저기 무너진 돌무더기가 뒹굴었다.

불을 비추자 돌무더기 사이로 무전을 하는데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깃줄이 보였으며

바닥에는 흰색 주사용 앰플, 깨진 갈색 병, 깡통, 50여 개의 배터리 그리고 바닥이 반으로 갈라진

 검푸른 고무신 한 짝이 주인을 잃고 잠들어 있었다.

은신처는 둘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성인남성 4명이 누울 수 있는 공간에

약품, 병, 깡통, 고무신, 전깃줄이 집중적으로

 놓여있었던 걸로 보아 은신처 입구는 주거 공간,

그리고 더 깊숙한 내부는 50여 개의 배터리와 전깃줄이 많이

놓여있었던 걸로 보아 통신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됐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었다.

이 두개의 공간은 성인이 두 무릎을 모으고 머리를 숙여야 오리걸음으로 걸어야 지날 수 있는 통로로 연결돼 있었으며
 

통신을 위한 공간은 두 사람 정도의 성인남자가 누울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다. 

 

   

 

 

 

 김영승씨의 설명에 의하면

이 굴은 박영발 위원장을 호위하고 있는 보위대가 반야봉 중허리를 훑어 발견한 천연동굴로

박 위원장 외에 무전사, 여성비서, 견습무전사 의료병 등 8명이 생활하며 북측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지령 등을 모아

유인물을 만드는 ‘조국출판사’일을 하고 있었다.
김영승씨는 “적들이 없을 때는 동굴 및 구들장터에 천막을 짓고 생활하고

적들이 가까이 있을 때는 동굴에서 생활하곤 했다”고 전했다.
실제 동굴을 빠져나와 50여m 내려가니 3층으로 쌓아올린 돌 위에 흙을 얹어 평평하게 다진 '구들장터’가 있었으며

구들장터에서 오른쪽으로 10m 더 가자 불을 땐 아궁이도 발견됐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돌과 흙이 달아올라 따뜻해진다.

여기에 천막을 세우면 추운 겨울도 날 수 있다.

구들장터에선 인쇄하는데 사용했던 등사기도 발견됐다.

 등사기와 함께 발견된 잉크통에는 검은색 잉크가 고스란히 담겨있어 일행을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모든 생활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이 곳에서 생활한 빨치산의 유골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토벌대가 시신을 모두 끌어다 인근 산내면 초등학교에 전시한 뒤 체포당한 빨치산을 불러 신원을 확인하고 처분했기 때문이다.

김영승씨는 “언젠가 시간이 되면 70.80대 노인들에게 수소문해서

그때 당시 상황과 시신들을 어떻게 처분했는가를 물어볼 생각이다”고 밝혔다.

이 곳에서 생활하던 이들은 54년 2월 22일, 동굴을 발견한 군경이 던진 수류탄으로 동굴 안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이 중 박 위원장의 여성비서 이정례 만이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사경을 헤매다 마침 식사를 들고 오던 보위대에게 발견된다.

 이정례는 이후 화개재에서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다 뱀사골에서 토벌대에 의해 사살 당한다.

주위에서 잠복을 하며 매일 토벌대의 동태를 감시하던 보위대는 전라도에서 활동 중이던

다른 보위대와 결합해 55년까지 전라도 조계산에서 싸우다 전멸한다.

 

박영발비트를 찾아가는 길은 뱀사골 유유교를 지나 50m 올라가면

계측기탑이 보이는 곳에서우측 뱀사골을 건너 제방처럼 둘려쳐진 너덜을 올라가면 또다른 계곡이 보이는데

그 계곡이 폭포수골이다.

폭포수골 계곡을 따라 고도 1270m 부근에 직경 15~20cm 크기의 호박돌이 박혀있는 폭포가 나타나는데,

이 폭포에서 11시 방향의 고도 1330m 부근에 위치해 있다.또다른 길은 묘향대 아래쪽의

돌담 부근에서 진입해서 원시림을 지나 계곡을 따라 계곡 합수점까지 내려가면 된다.

계곡 합수점에서 폭포수골 등로를 따르지 않고 계곡에서 45도 방향의 선명한 등로를 따르면 된다.

계곡합수점에서 5분 이내에  찾을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