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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마음은 태양/살며 사랑하며

카이사르, 루비콘강을 건너다.

 

갈리아 원정 성공한 카이사르

원로원·폼페이우스가 음모 꾸미자 군대 이끌고 로마 진격해 권력 장악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황제 등극

 

오늘날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말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란 뜻

 

'루비콘강을 건넜다'라는 말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에 그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뜻해요.

이탈리아 북동부에 있는 작은 강 루비콘강은  고대 로마의 대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BC 100~BC 44)와 깊은 연관이 있다.

 

명문가 청년, 빚더미에 앉다

 

카이사르가 태어났을 무렵 로마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어요.

귀족들이 원로원과 집정관(로마 공화정의 최고 관직) 등 공화정 내 권력을 독점하며 대농장을 운영한 탓에

평민과 귀족 간의 빈부 격차가 너무 커졌기 때문이었죠.

이에 농지 개혁을 주장하는 민중파와 개혁에 반대하는 귀족파가 격렬한 대립을 보였고,

이는 민중파 마리우스와 귀족파 술라 간의 내전으로 이어졌습니다.

내전에서 승리한 술라는 무자비한 숙청으로 공포정치를 펼쳤는데, 카이사르는 이 시기에 유년 시절을 보냈어요.

   

기원전 52년 카이사르가 알레시아 전투에서 승리한 뒤

 갈리아 족장이 카이사르에게 항복하는 모습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카이사르의 집안이 마리우스파로 지목된 탓에 카이사르의 출세는 남들보다 조금 늦은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친화력으로 맡는 관직마다 탁월한 성과를 보이며 대정치가로서의 기반을 쌓았어요.

 

특히 그는 막대한 빚을 져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아주 유명했습니다.

책이나 옷을 사는 데에 돈을 전혀 아끼지 않았고,

아리따운 여인들에게 값비싼 선물을 주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의 빚 대부분은 사실 자비로 도로 보수 사업이나 검투사 대회를 열었기 때문이었어요.

빚더미에 앉은 대신 로마 시민의 열렬한 지지를 얻은 것이죠.

 

삼두 정치와 갈리아 원정, 그리고 루비콘강

 

승진을 거듭한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오늘날 스페인) 속주의 총독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뒤

집정관이 되기 위해 당대 최고의 장군 폼페이우스를 찾아갔어요.

 당시 폼페이우스는 그의 병사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문제로 원로원과 갈등을 빚고 있었는데,

이를 간파한 카이사르는

 "내가 집정관이 되면 당신의 부하들에게 농지를 나누어 줄 테니 집정관에 선출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제안했어요.

폼페이우스가 이를 승낙하자 카이사르는 로마 최고의 부자였던 크라수스도 끌어들여 집정관이 되는 데 성공합니다.

이후 로마의 정치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세 사람의 동맹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는데,

이를 '삼두 정치'라고 하지요.

 

집정관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방(오늘날 프랑스)의 총독으로 부임했어요.

이후 8년간 카이사르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으로 갈리아인과 게르만족을 제압해 로마 영토를 갈리아 전역으로 넓혔어요.

그 결과 카이사르는 막강한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얻었고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인기도 한층 더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곧 중대한 위기에 빠졌어요.

갈리아 원정에 나선 사이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전쟁 중 사망했고,

농지 개혁에 적극적인 카이사르를 못마땅하게 여긴 원로원 보수파 귀족들이

폼페이우스를 끌어들이면서 삼두 정치가 무너졌기 때문이죠.

 

폼페이우스를 등에 업은 원로원은 갈리아 원정을 마친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에 돌아오라"명령을 내렸어요.

카이사르가 무장을 해제하고 로마에 들어오면 여러 가지 죄목을 씌워 제거할 심산이었죠.

이를 간파한 카이사르가 귀국을 미루자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카이사르를 격파하라고 요구했어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향하던 카이사르는 갈리아와 로마 본국의 경계인 루비콘 강변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법은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했어요.

이를 어기면 반역죄로 간주하였지요.

 

잠시 고민한 카이사르는 부하들에게

"주사위는 던져졌다" 루비콘강을 건널 것을 명령합니다.

강을 건너는 순간 카이사르는 쿠데타에 성공해 권력을 잡거나

반역죄로 죽음을 당하는 두 가지 운명 중 하나를 피할 수 없게 되었지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뜻의 '루비콘강을 건너다'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카이사르의 죽음과 로마제국의 탄생

 

카이사르가 예상보다 빨리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자

 당황한 폼페이우스와 원로원 귀족들은 이탈리아 밖으로 도망쳤어요.

 폼페이우스는 반격을 노렸지만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와 그리스에서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물리치고 종신 독재관이 되었습니다.

명실상부 로마의 1인자가 된 것이죠.

 

하지만 그의 1인 통치는 '카이사르가 왕이 되려 한다'는 의심을 키웠고,

이 의심은 화살이 되어 카이사르에게 날아왔습니다.

기원전 44년 원로원 회의장으로 들어서던 카이사르는

양아들 브루투스와 공화정을 옹호하는 귀족들이 휘두른 칼에 숨을 거두었어요.

죽기 전 양아들을 본 카이사르는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요.

 

하지만 카이사르의 등장과 죽음은 더 이상 로마가 공화정으로는 지탱될 수 없다는 걸 의미했습니다.

카이사르가 죽자 그의 후계자로 지목된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여러 경쟁자를 물리치고 로마 초대 황제가 되었어요.

이렇게 450여년간 이어진 로마 공화정은 무너졌고,

로마는 제국으로 재탄생했습니다.

그 발단은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넌 순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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