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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한 산 이야기/길위에서길을묻다

강진 백련사에서 다산초당 가는 숲 길

 

강진 고향에 갔었던 주말...!

잠깐의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넘어가는 숲길을 다녀왔다.

진달래와 동백이(만개했던 동백이 떨어지는 시기와 진달래 피는 시기가 일치함) 피여나는 3 , 4월 즈음이면

더 멋진 숲길이 될수도 있겠지만 아이들 걸음에 맞추어서 가볍게 걸음해 보았다.

   

역사길(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 탐방로 )

   백련사 - 다산초당까지의 길 안내

 

 - 백련사에서 다산유물전시관까지 3km 정도의 생태숲

 -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는 1 km ,

 - 역사길 또는 문화생태 탐방로 라고도 불리며, 

    " 다산 유배길 " 삼남길" 로도 불리운다.

 - 다산유배길 전 4구간중 1구간에 해당함

 - 소요시간 : 느긋한 마음으로 1시간 / 왕복2시간

 - 동백숲, 녹차밭, 해월루,천일각,정석,다산체험관

    뿌리의 길, 두충나무 숲길, 다산유물전시관등을 만날수 있다.

 - 다산초당 소재지 :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 문의전화 : 강진군청 문화관광과 ☎ 061- 430 - 3782

 

 

 

 

다산 정약용선생이 실학정신을 꽃피운 숲길

정약용 선생은 천주교 박해로 시작된 총 18년의 유배기간중 반 이상을 다산초당에서서 머물며, 그의 저서인 목민심서 등을 집필하였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  이어지는 숲길 초의선사와 함께 시국담을 나누며 자주 거닐었던 유서 깊은 숲길로 전해진다.

 숲길 초입에는 천연기념물인 제151호로 지정된 동백나무 군락지가 원형 그대로 존재하고 있고,

숲길 주변에는 수령 100-300년,  동백나무 1500본과 참나무류를 비롯하여 ,

소나무 ,차나무, 비자나무 후박나무 가시나무 등이 천연 혼효림을 이루고 있다.

- 강진군청 문화관광과  -

 

          ▲ 백련사 주차장 초입

 

 

 

백년은 훨씬 더 먹었을 베롱나무밑으로 보여지는 강진만이 아름다운 사찰, 강진 백련사..!

12월 초순의 이곳에는 베롱나무꽃도,연보라빛의 진달래도, 또  흐드러지게 피여나서 한숨처럼 떨어지는 동백꽃도 없다.

이것들을 대신하여

아직까지 지 갈곳을 모르는 가을 단풍이 청승처럼 연명하면서 겨울 찬바람에 휘둘리고 있다.

 

오늘 이곳 백련사에는 긴 겨울동안 일용할 양식이 되어줄 김치를 담그는 날이라고 한다.

동백꽃 피는 철도 아닐진데, 주차장에 때아닌  차들은 이 김장을 돕기위한 차들이였던 모양이다.

 


 강진  백련사

   백련사의 본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이며 조선후기에 만덕사로 불리우다가 현재는 백련사로 부르고 있으며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명종(1170년)때 원묘국사 요세에 의해 중창되었다. 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8대사가

 머물렀던 도량이며 고종 19년(1232년) 에 원묘국사 3세가 이곳에서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결사를 일으킨 유서 깊은 명찰이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겹처마인 다포식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이 삼존불은 중앙 본존불이 석가여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좌우의 불상은 보살상이 배치 되어야 하는데도 여래상을 안치한 점이 특이하다.

 

                                                                                                 - 강진 군청 문화관광과 -

백련사에는 백년 이상의 세월을 먹었음직한 베롱나무가 두군데 있다.

첫번째는 대웅보전앞 수돗가 옆에 있는 것이고 , 두번째는 대웅전 지난 윗쪽(건물이름을 모름)에 있다.

사진으로 담아내기에는 역시 윗쪽이 훨씬 좋다.

백련사 절칸 지붕위로 보이는 강진만, 그리고 강진만 뒷쪽으로는 억새로 유명한 장흥 천관산이다.

예전에는 아랫쪽 베롱나무도 인기가 좋았다.

고즈넉한 찻집안(지금은 뻘춤한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함)에서 창살사이로 보이는 베롱나무꽃과 구강포가 일품이였기 때문이다.

 



백련사 동백림      

  천연기념물 제151호인 백련사 동백림은 도암면 만덕리 소재 백련사 위의 경사지

  4.3㏊면적에 7,0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집단으로 군락을 이루어 자생하고 있다.

  나무의 높이는 7m쯤 되고 줄기 아래부터 가지가 갈라져 관상목으로 된 것이 많으며

  주위에는 비자나무, 후박나무, 왕대나무, 차나무 등이 자생하고 있다.

 

  동백꽃은 초겨울부터 기온에 따라 한두송이씩 피고 지기를 계속하면서 겨울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때문에 좋은 경관수로 조선시대에는 동백 혹은 산다화(山茶花)

  라 하여 시인과 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또한 이곳 백련사의 동백은 꽃잎을 따 녹차, 밀, 수수, 찹쌀, 보리 등의 가루를

  이용하여 전을 부쳐 전차(錢茶)와  함께 간식이나 손님 접대용으로 썼다는

  동백화전은 그 역사가 수백년에 이른다고 전한다.

                                                  

               - 강진 군청 문화관광과에서 -


백련사 동백숲길에서  - 고재종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 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배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 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꽃부리와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박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은물결로든

그예 씻어 보겠다는 나인가


 ▲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은 백련사 우측 동백림을 지나서

     갈수 있고 , 백련사 초입에서 녹차밭으로 바로 갈수도 있다.

▲ 백련사 녹차밭으로 이곳에서 약간의 계단길을 오르고 나면

    다산초당 까지는 순탄한 숲길이 이어진다. 능선 정점에는

    해월루가 있고 이곳에서는 강진만이 훤히 내려보인다.


걷기 싫어하는 딸아이, 그리고 빨리 집에가서 게임을 하고 싶은 아들아이

도무지 오늘의 차분한 역사길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 엄마 아빠 마음데로 움직이는 이 걸음들이

한없이 짜증스러울 뿐이다.

아무리 달레고 꼬드겨도 요지부동..! 돌팍 지도 오기가 머리끝까지 올라올즈음

신통하게 핸폰카메라가 이 모든 고민으로부터 깔끔한 해결을 해준다.

 

딸아이가 이렇게 신나고 제미있어 할줄은..ㅎㅎ

결국 지들도 무언가 제미붙이고 열중할수 있는 꺼리라는 것이 있어야 했던 것이구나...!

 

이러다가는 아들, 딸을 위한 카메라  사줘야 하는 것은 아닐른지..ㅎㅎ

 


딸아이...지가 오늘 핸드폰 카메라도 담은것중  알수없는  이  열매가 가장 이쁘고 잘 찍혔다나..ㅎㅎ

열매이름..? 배풍등

 

 

 

         ▲ 해월루에서 보이는 강진만,   간척사업으로 강진만이 절반으로 쪼개진 모습이다.

          예전 다산이 다산초당에서 혜장스님을 만나오 오는 길에서 보여지는 풍경은 한폭의 멋진 그림이기도 했으리라.

 

 


▲ 강진만을 한눈에 조망할수 있는 해월루, 예전에는 뻘춤한 건물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싶었는데 , 이것도 세월을 먹었는지

나름 운치있어 보인다., 이곳에서 다산초당까지는 600m, 백련사까지는 200m 거리에 있다.

이 숲길의 도상거리가 다 같지않은 것은 주차장에서 백련사까지 오르는 거리와, 다산초당에서 주차장까지 내림하는 거리가

빠져있거나 포함할때 보이는 편차이지 싶다. 더불어 다산유물전시관까지 걸음할 경우에는 3km  가까운 걸음을 해야 한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 이어지는 이 길이

다산유배길 중 1구간인지..?

문화생태탐방로인지...?

그것도 아니면 삼남길인지...? 도무지 명확한 길 이름을 선택하기 힘들다.

 

어쨋든 이길은 지금보다는 동백이 한숨처럼  후두둑 떨어지고 ,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여나는

4월초부터 중순까지가 가장 좋다.

동백은 피여나는것도 이쁘지만 눈물처럼 떨어져서 산화하는 모습은 더더욱 이쁘기 때문이다.

 

백련사를 품고 있는 산은 만덕산으로 이 산에도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여나곤 하는 곳이다.

 

※ 삼남길이란..?

 해남에서 시작해 강진∼영암∼나주∼광주∼장성을 거쳐 서울에 이르는 500㎞ 내외의 길을 말하는 것으로

  전남도 구간은 약 200km.   그중 강진 구간으로 다산유배길  겹쳐있다.
‘삼남대로’는 조선시대 천안에서 영남대로와 나눠져 전주, 광주, 목포방향으로 이어지는 길로, 군사는 물론 진상품이 이동했던 경로다.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간 길로 알려져 있고 한반도 동맥과 같은 역할을 했었지만 지금은 거의 잊혀진 상황이다.

다산유배길이란..?

 정약용의 남도 유배길은 삼남대로를 따라서 다산수련원~다산초당~백련사~철새도래지~김영량생가~무위사~태평양 녹차밭~

천황사 지구~월출산 자락 웰빙로~도갑사 ~왕인박사 유적지~영암구림마을까지 55㎞를 말한다.

 

백련사 가는 오솔길

찌뿌듯한 하늘이 맑게 갠 어느 봄날, 냉이 밭에 하얀 나비가 팔랑거리자 다산은 자기도 모르게 초당 뒤편

나무꾼이 다니는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들판이 시작되는 보리밭을 지나며 그는 탄식했다.

 "나도 늙었구나, 봄이 되었다고 이렇게 적적하고 친구가 그립다니

백련사에 혜장선사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벗될 만한 이가 없는 궁벽한 바닷가 마을에서

혜장은 다산에게 갈증을 풀어주는 청량제 같은 존재였다.

 혜장은 해남 대둔사 출산의 뛰어난 학승이었다.

유화에도 식견이 높았던 그는 다산의 심오한 학문 경지에 감탄하여 배움을 청했고 다산 역시 혜장의 학식에 놀라

그를 선비로 대접하였다. 두사람은 수시로 서로를 찾아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지으며 차를 즐기기도 했다.

혜장이 비 내리는 깊은 밤에 기약도 없이 다산을 찾아오곤 해서 다산은 밤 깊도록 문을 열어 두었다고 한다. 

다산과 혜장이 서로를 찾아 오가던 이 오솔길은 동백숲과 야생차가 무척 아름답다.

그러나 이 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친구를 찾아가는 설렘일 것이다. 보고 싶은 친구를 가진 기쁨, 친구를 찾아가는 길의 행복

 

- 강진군청 문화관광과 -

 

 

 

 

          다산선생이 시름을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

          천일각이라는 이름은 '하늘 끝 한 퉁이' 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인 것이다.

            다산의 유배시절에는 없던 건물인데,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 중인 형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975년 강진군에서 새로 세웠다.

          이곳에서 다산선생이 강진만(구강포)을 바라보면서 시름을 달랬을거라고 하는데  지금은 소나무들이 자라서 조망이 시원하지  못하다.

   동암(東)

               송풍루(松風樓) 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 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 茶山東庵)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 모각(模刻) : 조각 작품을 그대로 본떠 새김.

                       ※ 집자(字) : 글씨 쓰거나 시문 짓기 위해서, 문헌이나 선인() 비첩() 따위에서 필요한 글자 찾아서 모음.


                                                                             ▲ 다산초당과 丁石이 새겨진 바위


 강진은 조선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유재되어

18년간 머문 곳이다. 그중 가장오랜기간(11년)머물며 후진 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가 바로 이곳

다산초당이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후인 1801년(순조원년) 신유박해에 뒤이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사의재,  고성사

보은산방 등을 거쳐 1808년에 외가(해남윤씨)에서

마련해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배가 풀리던 1808년까지 다산은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고 글 읽기와 집필에 몰두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음흠신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 다산초당

  강진만이 한눈으로 굽어 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18년중 10여년 동안을 생활하시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등 500여권에 달하는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 하였던 곳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다산초당은 노후로 인해 붕괴되었던 것을 1957년 복원하였고 그 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 다산초당에는 이밖에도 다산선생이 「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사경과 다산선생이

시름을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 강진 군청 문화관광과에서 -

 

 

 

 

 

 

다산초당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에서는 일명 뿌리길을 만난다.

당연 땅속 깊숙한곳에 자리했어야할  이 뿌리들도 사람들의 발길과 빗물에  씻겨 만신창이가 되었으리라.

비오는 날과 눈내린 날들에는 유독 미끄럽기만 할  이 뿌리길

뿌리길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방치하는 것보다는 추운 겨울을 거뜬히 날수 있도록

충분한  흙을 덮어 주어야 하는 것을 아니였을까..?

 

뿌리의 길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닦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할

길이 되어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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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유물전시관은 다산초당 남쪽 800m 지점에 위치하며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애와 업적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영정 다산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 등이 판넬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 있으며  좀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을때는

 컴퓨터를 활용한 터치스크린 에서 검색해 볼 수 있다.

 영상실은 다산의 일생과 강진을 소개하는 영상물이 약7분 동안  상영되는데 

 관광객이 영상실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상영되므로 누구나 불편 없이 관람

 할 수 있다.

 

이용시간 : 동절기 09:00 ~ 17:00, 하절기 09:00 ~ 18:00    연중무휴
찾아가는 길 :
  강진버스터미널 -> 국도18호 -> 강진군 학명리 추도삼거리 좌회전 
   -> 도암방면 군도 2호선 -> 귤동입구 -> 다산유물전시관

 

그리고 큼직한 은행나무가 나오면 오늘의 가벼운 숲길 나들이가 끝이난다.

다산유물전시관을 가기위해서는 15분정도를 더 걸어야 할테고, 두고온 차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강진 택시를 불러야 한다.

강진 콜텍시 비용은 12,000원(백련사로 가거나 , 강진 터미널로 가도 같은 가격이다.)

다산초당 초입에 위치한 소품가개 아저씨 말로는 백련사로 가로질러갈수 있는 지름길이 있다는데 선뜻 내키지않는다.

이 양반들은 종일 사람들과의 말문이 고팠는지,  묻지 않는 말들에 애써 친절을 베풀겠노라  서로 아우성이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