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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마음은 태양/고향이라는이름

유년의 기억으로 돌아보는 고향마을

좁은 골목길을 가득 채웠던 동네 꼬마 녀석들은 다들 어디에 있을까..?

고향이라는 이름

고향이라는 단어가 조만간 사전에서 지워지는 단어가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아재들 세대, 나이묵은  어르신들 세대가 지나면 고향이라는 단어를 기억해 낼 사람이 있을까 싶은 것이다.

대도심에서 나고 자라왔던 젊은 세대들에게는 고향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없을 것이다.

물론 "수구초심"이라는 말도 마찬가지 일 테고..!

물론 나란 녀석의 고향에도 갈수록 빈 집은 늘어가고 젊은 사람들은 시골을 떠나서 돌아오질 않는다.

옹기종기 촘촘하게 터를 잡고 살았던 시골 깡촌마을에는

이제 열손가락으로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있을 만큼 한적하고 쓸쓸한 마을로 변해가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시골 고향풍경마저도

지나고 나면 기록이고 추억일 것이니...!

애써 아침 일찍 앙상해진 시골마을 골목길을 돌아본다.

신기마을에서 삼화마을로 올라가는 길에...

멀리 뒤쪽으로는 호기심 삼아 가끔씩 찾곤 한다는 화방산의 첫 조망터인 돛대바위

 

 

이곳은 큰 아버님 집으로

예전, 예전의  아주 오래전에는 이곳이 방앗간이었다.

이 조그마한 마을에서도 든든한 방앗간이 있어서

모든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참새 방앗간처럼 이용했으리라..!

내 유년의 기억에서도 방앗간의 엔진 돌아가는 소리가 아직도 먹먹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이 방앗간이었던 건물은 적어도 50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는 건물이다.

물론 방앗간 기능을 잃고, 지붕은 양철지붕으로 바뀌었지만

세월의 물때가 묵은 돌들과 흙담, 그리고 아직도 썩지 않고 버티고 있는 나무 문짝은 그대로 남아서

기나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이야기해 주고 있다.

이곳 큰아버지 집은

내가  아주 어릴 때는 이곳에 엄마와 함께 아버지의 주정을 못 이겨 피란을 오곤 했던 도피처이기도 했다.

이 집에는 6형제의 형들과 누나가 있었는데

우리 집 식구가 피란을 왔을 때도 말없이 방 한켠을 내주셨던 큰어머님

물론 두 분 모두 영면하시진 오래다.

 

큰어머님이 늘상 바람 스치듯이 하시던 말씀...!

" 느그 아버지가 젊었을 때는 얼마나 잘 생겼는지 아냐...? "

그란디

" 너는 니 아부지보다 더 잘생겼다야..! "

하시던 큰어머님 말씀이 아직고 귀에 아른아른  귓전을 맴돌곤 한다.

이 집은 마을 한복판, 가운데(윗골목, 가운데골목, 아랫골목 중 가운데..!) 골목이 시작하는 곳에 있는 집으로

작은아버지와 동네 목수들이 좋다는 구들장들과 좋은 목재로 멋스럽게 지은 한옥집이라고 한다.

얼마나 튼튼하게 기와를 올렸으면 아직도 흘러내리는 비틀림이 없을까..?

면에서 보면 지붕의 용마루가 유연하게 곡선을 이루는 게 나름 일품이다.

이 용마루는 가운데는 낮고 양쪽 모퉁이로 가면서 높아지는 유연한 곡선형을 이루는데

이 방식의 용마루는 남부지방 한옥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도 한다.

 

유년의 시절에는 이곳에 나보다 한 살 많았던 동네 형집으로 주요한 우리들만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왼쪽 정면 빨간 창고 같은 건물이 정문이었었고, 우리는 비오늘날의 비를 피하는 놀이터가 되어주던 곳이기도 하다.

 

아래 사진의 창고 또한 그 유년의 시절부터 자리를 잡았던 건물이니...

적어도 50년의 세월을  끄떡없이 자리 잡고 있는 모양이다.

창고에 나락을 을 흐트러놓고, 참새가 먹이를 찾아 들어가면 문을 닫아서 참새를 잡곤 했던...ㅎㅎ

 

윗마을 공동 우물터로 이용하던 삼화정 (2012년과 2024년의 삼화정 샘터모습)

삼화마을 위쪽에 살던 사람들의 주요한 식수원이자 생활의 중심지로

모든 생활의 시작은 이곳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우리 집도 물이 귀했던 곳이라 이곳에서 물을 질러다 먹었을 것임은 틀림없을 것이고

그 어린 나이( 국민학교 1.2학년쯤 되었을까..?)의 나란 녀석에게도

"T자 물지게"로 물을 질러 날랐던 기억이 선명치 못한 아스라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은 사람 떠나고, 공동 상수원이 만들어져 수돗물이 연결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펌프로 물을 끌어올리지 않는 한,  물을 질러 모았던 것은 어느 집이나 매 한 가지였을 것이다.

오랜만에 애써 찾아보았던 유년과 같이했던  추억과도 같은 정겨운 샘터도

그 옛날의 왁자한 추억만을 머금은 채 켜켜이 내려앉은 낙엽들이 세월의 무덤을 만들어가고 있다.

고만고만한 텃밭으로 변한 이곳도 그때는 누군가의 집이었는데...

사람 떠났던 시간이 하도 오래되어서 누구 집이었는지도 가물하다.

나보다 두어 살 더 먹었을 누님이 있었던 듯싶은데... 기억이  선명하질 않네...ㅎㅎ

동네  꼬마녀석드이  떠들썩하게 휘돌고 다녔던 주요한 골목인 윗골목길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골목길이 담벼락에는 수십 년의 물때가 내려앉았고

변한 것은 흙길이던  골목이 아스팔트길로 진일보했다.

그리고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담벼락과

세월의 양분으로 튼실하게 성장한 감나무에는

사람 손을 타지 않아서 원 없이 주렁주렁한 가을이 익어가고 있을 뿐이다.

감나무 뒤로 보이는 집은  고향마을 동기들 중 두 명의 여자친구 중 한 명이 살던 집이다.

남자애들 5명과 여자애들 2명이 동기로 같이 어울려 다니곤 했었는데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들 살고 있는지...?

 

삼화마을을 허물어지기 직전의  창고,  또한 전설 같은 세월을 자랑하는 건물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있었을 것이니 적어도 60년 이상의 나이를 묵었겠다.

이곳은 국민학교에 다니는 모든 아이들이 아침부터 이곳에 모이면 6학년 꼬마대장( 선도부원이라 했던가..?)이

마을 깃발을 앞세우고 1시간 정도 거리의 국민학교까지 도열을 이루어 등교를 하곤 했었다.

또한 

이곳은 동네 꼬마 녀석들의 놀이터의 중심지로 이곳에서부터

모든 놀이의 시작이 되었던 곳으로 항상 왁자한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

남자아이들은 딱지치기와 구슬치기, 계집애들은 줄넘기나 땅따먹기,  등등을...

사람 떠나고 빈집만 늘어가는 이곳 고향마을에도 언제부턴가는 조그마한 마을버스가 지나고

지자체에서는 비루하게 허물어져내리는 담벼락을 보수하여 이쁘장한 그림으로 색칠을 해 주고 있다.

마을과 첫 대면하는 마을회관 앞

그나마 초라하지 않고,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기는 듯하다.

그리고는 마을회관에서 아래 마을 큰집이 있었던 곳으로 돌아간다.

내가 살았던 유년의 시절에는 고만고만한 집들이 꽤나 있었던 듯싶은데

지금은 도무지 흔적을 찾을 수 없이 완벽한 자연으로 돌아갔다.

지금은 완벽하게 자연으로 돌아가버린 아르테( = 아랫동네정도의 뜻을 가지고 있는 듯?) 큰 아버님 집

이곳 삼화마을의 대표적인 부농으로 하동 평사리마을의 최참판댁쯤 되겠다.

조선시대도 일제강점기도  아닌

70-80년도에도 머슴을 부리고 살았던 집이었으니..ㅎㅎ

 

나란 녀석은 큰아버지라는 분은 애초부터 뵌 적이 없었던 것 같고

큰 형님을 큰아버지로 잘못 알고 유년을 보냈다는...!

 어른이라는 나이을 묵고 나서야 나란 녀석이 워낙에 항렬이 높았기에  종친에서는

웬만해서는 나의 항렬을 결줄 수 없음을 알았었다.

 

이곳 큰 집에서는 연중 조상님들 제사가 즐비하게 이어졌고, 이 제사가 있는 날에는

이틀 삼일은 이곳에서 묵고 놀고 했었다.

그 많은 제사들을 챙겼을 형수님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녔을진대...!

 

그때는 다 그렇게들 살아왔던 지나간 시절의 우리들의 전통 생활이었을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부유했던 양반집의 집터는 완벽하게 사라지고 없는데

아직도 외롭게 최면장님 댁을 지키는 감나무만이 독야청청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구나..!

최면장님은 큰아버님의 큰아드님이셨다.

 

 

금세 마을 한 바퀴를 돌아서 다시 집으로 가는 길

마을 앞 논바닥 한복의  거대한 축사를 시야에서 약간만이라도 가려보겠노라

설 누님은 금목서라는 나무를 헛심 쓰듯 공들여서 심었다.

지금보다는 더 키가 자라고 고급스러운 향을 풍기면 더 멋스러운 품위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이곳 가로수 밑에 수북한 잡풀을 베어줄 사람 한 명이 없어 방치되고 있어서 

없잖아 마음이 편칠 못하다.

그렇다고 나란 녀석의 서투른 낫질로 잡풀을 베어내기도 곤욕일 테고..ㅎㅎ

진태,  효수형, 태수형님네집

그나마 젊은 일꾼이 드나드는 집이다.

몇 해 전까지 이 형들의 노모가 치매와 함께 간신한 연명을 하고 계셨는데 이 분 또한 영면의 길로 떠나셨고

지금은 태수형님만이 자주자주 드나들면서 집 주변의 텃밭들을 관리하고 있다.

조만간 본 집으로 귀농이라는 것을 할 것으로 보인다.

다시 삼화주골

그 옛날의 유년에는 이곳 삼화주골에서 꽤나 여러 집이 모여 있었는데..

나의 깨복쟁이 친구였던 조카이면서 절친인 정순이라는 녀석의 집이 있었고,

울 아버지의 술친구 아들인 춘현이라는 녀석의 초가집도 있었다.

그리고 초가삼간 불태워먹고 고향을 떠난 성형이성 집도 있었구나..ㅎㅎ.

어렸을 적에 고향을 떠난 도시촌놈인  순승이라는 녀석의 집도 있었고

이름도 기억하기 전에 고향을 떠난 몇몇의 집도 아슬하게 기억이 되고 있다.

설 누나 친구집

그 유년의 시절에는 이 집에서 동네 영화관처럼 마당에 앉아서 나시찬의 전우와

옥녀와 전설의 고향이라는 드라마에 빠져들곤 했던 곳이다.

이 마을에는 당시 테레비라는 것이 다해서 3대 , 4대쯤  있었을 것이다.

그중 저녁시간에 동네 영화관이 되었던 곳은 이곳 설 누나 친구집이었고

낮 동안 동네 꼬맹이들의 영화관은 마을회관 구판장을 운영했던 영록이 집이었지 않았나..?

삼화주골 설 누나 친구집이 어른들을 위한 성인영화관이었다면

영록이 집에서는 마징가 Z, 태권 V 같은 공상과학만화를 상영하는 어린이 프로그램 영화관 ㅎㅎ

그리고 나머지 두 군데는 소통 불능...!

삼화주골의 터줏대감이면서 신흥 부농이었던

사촌 형님의 아들인 정순이집( 이 친구는 종친 항렬로는 조카이면서 개복쟁이 고향 절친)

이곳 정순이집은 태어날 때부터 절친이었으니 오만 잡다한 추억이 가득한 곳이다.

앞에 보이는 동백나무며, 지금은 베어지고 없지만 하늘을 온전히 가렸던 큼지막한 감나무 추억까지...

그때는 먹을 게 없던 때라...

땡감은 소금물에 우려서 먹었었고, 몇 구로 없었던 단감은 단물이 들기 전에 

아그들의 허기진 간식용으로 사라지고 없었던 때이기도 했다.

올해, 조카이면서 깨복쟁이 절친의 아버지인 사촌형님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또 한분이 영면의 길을 택하게 되셨고,

또 대책 없이 사람 발길이 끊어지는 가옥이 하나 더 되었다.

깨복쟁이 절친인 정순이네 사랑채

소 여물을 쌂았던 사랑채는 늘 뜨끈 뜨근했었고, 고만고만한 동네 아그들이 모여 지내던 곳이기도 하다.

언제 적일까..? 국민학교(그때는 초등학교를 이렇게 불렀다 ) 때  고향을 떠난 뒤

10여 년이 지난 대학 졸업 후 다시 찾았으니...?

간만에 고향마을 또래들과 1년 아래 동생들과의 술자리..!

술안주는 고만고만한 명절음식에 소주는 30도 댓병이고, 술잔은 시골마을에서 사용하는 박그릇(밥그릇)이다.

콧딱지만 한 소주잔에 길들여졌던 나란 녀석의 신박한 문화적 충격..ㅎㅎ

그런 날들의 기억이 벌써 35년의 가물한 기억으로 지워져 가고 있다.

삼화주골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 나오는 길

삼화마을 최 전방에 자리 잡은 우리 집으로 가는 길에 가을로 물들어가는 담쟁이와 

달벼슬같이 생겼다는 맨드라미, 강아지 풀이 가을걷이가 끝난 논밭 주변에서 

다가오는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예전에는 고향동기였던 순승이네 집이었던 집과 고당댁집이 통합이 되었고

지금은

수일아저씨가 떠돌이 들고양이와 날이면 날마다 배고픈 강아지가 함께 

외로움을 달래며  살고 있는 집이다.

▲ 2012년 4월  ▼아래사진은 2024년 11월의 모습

12년의 시간 동안에 마을 앞 전경이 이렇게 변화를 보였구나.

마을공동 목욕탕으로 사용되었던 창고 같은 건물이 철거되어 우리 집 주차장으로 변신을 했고

낡고 허물 어질 것 같던 아래채와 정문을 죄다 철거하고 새로운 별장 같은 집으로 업데이트를 했다.

그리고 골목 오른쪽의 울창한 대무 숲을 제거하고 또 다른 별장 같은 집을 지어서 슬기로운 은퇴생활을

준비하는 목사님이 이사를 오셨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의 철부지 놀이동산이었던 뒷산에도 산불로 타버린 나무들이 금세 감쪽같은 

복원이 되어서 산불 흔적을 감쪽같이 감추어졌다.

10년 세월은 강산을 변하게 한다더니만

강산뿐 아니라 사람도 세월에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모를 일이 아닐까 싶다.

 

또 앞으로의 10년이 지나면 나의 유년의 고향마을은 어떻게 변해있을지..?

갈수록 기억도 가물가물 해 지는 유년의 기억으로

쇠락해 가는 고향의 향수를 느껴보는 시간이었다.

- 고향마을 강진에서..